[이광형이 만난 예인] 무형문화재 경기민요·태평무 이수자 이우호 명인

입력 2014-09-17 04:56 수정 2014-09-17 07:39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와 제92호 ‘태평무’ 이수자인 이우호 명인의 춤사위 모습. 춤과 소리의 맥을 동시에 이어가고 있는 그는 “세계무대에 우리 전통예술의 매력을 전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동국예술기획 제공
이우호 명인
가장 근원적인 질문 하나를 던졌다. “춤과 소리는 자신에게 무엇입니까.”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생명이지요. 살아서 꿈틀거린다는 것의 증거.” 30대 후반에 전통예술의 길로 들어서 20년가량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외길을 걷고 있는 이우호(56·사진) 명인. 그가 “춤과 소리는 나의 생명과 같다”고 말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서울 충무로 한국의집에서 만난 그는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 몰골이 말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미소년 같은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는 전통예술 분야에서 특별한 프로필의 소유자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와 제92호 ‘태평무’ 이수자다. 또한 제97호 ‘살풀이’ 전수자다. 춤과 소리, 두 장르에서 이수 및 전수자는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하다.

우리 민요는 크게 경기, 서도, 남도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이 가운데 가락이 부드러우면서도 다채롭고 맑고 명쾌한 것으로 부르기가 가장 힘든 것이 경기민요다. ‘창부타령’ ‘경복궁타령’ ‘군밤타령’ ‘천안 삼거리’ 등이 이에 속한다. 이우호 명인은 여자들도 소화하기 힘든 고음으로 이루어진 경기민요의 이수자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태평무는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춤으로 동작이 섬세하고 우아해 여성들이 주로 춘다.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으며, 이동안류의 춤은 서민적인 소박함과 귀족적인 장중함이 혼합된 형태로 흥과 멋이 조화를 이룬다. 강선영류의 춤은 율동이 크면서도 몸짓이 우아하고 화려하다. 이우호 명인은 이 두 가지 장점을 두루 갖추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음악과 춤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그는 국악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젊은 시절, 의류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을 하는 동안 숱한 고초와 역경을 겪었지요. 고생도 많이 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 우울증이 찾아온 거예요. 아내가 전통예술을 본격적으로 배워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잊고 있었던 춤과 소리를 다시 시작했어요.”

그때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그는 “처음엔 부끄러워서 연습 도중 거울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아내의 격려를 저버릴 수 없어 연습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나니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높은 음역의 구성진 목소리로 민요도 병행했다. 중앙대 국악교육대학원에 다니면서 이론도 공부했다.

2010년 제36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에서 무용 부문 장원을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공연이 줄을 이었고 관객의 갈채에 힘입어 전국 무대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2011년 추석 무렵 공연을 끝낸 직후 심장병으로 쓰러졌다. 119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이송돼 수술을 받고 위기를 넘겼으나 이후 두 번 더 쓰러졌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는 아내였다. 지금까지 민요와 무용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살아왔으니 건강을 되찾는 일도 민요와 무용을 통해서 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피나는 연습과 노력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2012년 제10회 전국국악대전에서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때 아내와 나눈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한국국악예술원 원장으로 중앙대 국악교육대학원에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그의 성공비결은 근면과 성실이다. 아침부터 민요와 무용 학원을 다녀온 후 저녁에는 집에서 혼자 연습한 결과물이다. 앞으로 전통예술을 이끌어 갈 후학들에게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한 가지만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가(歌)·악(樂)·무(舞)의 만능 엔터테이너가 돼라”는 말이다.

그의 소망은 우리 춤과 소리를 해외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10월 3일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릴 예정인 그의 무대는 전통예술 한류의 시작에 불과하다. “고(故) 박동진 선생께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했지만 현실은 암담해요. 전통을 지키고 해외에 알리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저의 무대가 우리 것이 좋은 것임을 전파하는 작은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