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더’로 얼룩진 태권도 편파판정=전모(18)군은 어리둥절했다. 또 ‘경고’가 나왔다. 심판은 경기 종료를 불과 50초 남긴 시점부터 자신에게만 경고를 7번이나 날렸다. 얼마나 고대했던 시합인가. 왜 경고인지 납득이 안 되는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5대 1 스코어가 순식간에 7대 8로 뒤집혔다. 코치가 이의를 제기했지만 되레 반칙패의 멍에만 썼다. ‘왜 나한테만 이렇게 경고를 많이 주지?’ 억울했지만 번복은 없었다.
전군의 아버지도 잠이 오지 않았다. 심판 최씨는 전군 아버지가 인천에서 태권도장을 할 때부터 ‘악연’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최씨 때문에 아들은 대회마다 억울한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최씨를 피해 아들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까지 보냈다. 하지만 최씨의 ‘마수’를 피할 수 없었다. 괴로워하던 전씨는 경기 보름 뒤 “잠이 안 오고 밥맛이 없다. 내가 지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선수 아버지의 죽음을 몰고 온 편파판정은 전군의 상대 선수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거였다. 지방의 모 대학 태권도학과 최모(48) 교수는 아들에게 태권도 특기생으로 대학에 갈 만한 입상 실적이 없자 학교 후배인 모 중학교 태권도 감독 송모(45)씨에게 청탁했다. 송씨는 고교 동문인 서울시 태권도협회 김모(45) 전무에게 일을 맡겼다. 김 전무는 다시 협회 기술심의회 김모(62) 의장에게 승부조작 ‘오더’를 내렸다. 오더는 김씨와 심판위원장인 남모(53)씨, 심판부위원장 최씨를 점조직처럼 거쳐 이날 경기 심판이었던 최씨에게까지 건네졌다.
심판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5번째와 7번째 경고는 부당하게 준 게 맞는다”며 혐의를 일부 시인했다. 하지만 그는 심판 자격 제명 처분이 아니라 서울시에서 심판으로 활동할 자격만 잃는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미숙한 점은 있었지만 고의성은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협회 전무의 ‘오더’, 점조직처럼 하달=경찰청 특수수사과는 태권도 선발전에서 승부조작을 주도한 혐의(업무방해)로 협회 전무 김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남씨와 심판 최씨 등 6명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15일 밝혔다. 또 2009년 1월부터 지난 2월까지 허위로 활동보고서를 작성해 임원 40명에게 협회비 11억원을 부당 지급한 혐의(업무상 배임)로 서울시태권도협회장 임모(61)씨 등 1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전군은 “승부조작을 밝혀줘 정말 감사드린다”며 “이 소식을 돌아가신 아버지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오더가 주로 점조직 형태로 전달돼 심판 최씨도 지시한 부위원장 외에는 윗선이 누군지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심판 배정과 운영에 관해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는 심판위원회의 위상과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승부조작 관행을 감안하면 경찰 설명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뿌리 깊은 승부조작, 구조적 대책 시급=이번 수사로 태권도계의 ‘치부’가 드러났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인맥과 학맥으로 얽힌 태권도계의 특정 선수 봐주기 관행이다. 이번 사건도 중·고교, 대학 동문인 선수 학부모와 협회 임원이 승부조작을 주도했다. 태권도계 내부에서는 지인을 통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상식으로 통한다고 한다.
심판위원회가 심판 운영에 전권을 행사하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윗선의 오더를 거부하면 일당 6만∼8만원을 받고 경기에 나서는 심판들은 생계를 위협받는다. 협회의 방만한 운영에 대한 관리감독도 개선돼야 할 과제다. 경찰 조사 결과 협회장 임씨는 협회 예산을 마음대로 썼지만 이사나 대의원 상당수가 임씨 측근이어서 이를 묵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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