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의 첫 장편소설 ‘모피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모피아가 형성된 이후 한국 경제의 역사는 모피아들이 좀 불편할 때와 행복할 때, 이렇게 두 가지 시기로만 나뉜다.” “출세하겠다는 개인의 욕망과 집단적 통치 의지가 뒤엉켜서 분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들의 의지는 강렬하다. 개인은 실패할 수 있어도 집단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는 모피아!”
낙하산·모피아의 진흙탕 싸움
소설 속 이야기지만 현실과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그간 산하기관들을 장악해 온 소위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들의 권력욕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경제의 혈맥인 금융권력을 움켜잡고 놓아본 적이 없다. 저자 말대로 다소 불편할 때만 있지 않았겠나. 경제 쿠데타를 일으킨 모피아와 시민의 정부 간 대결을 그린 ‘모피아’는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들은 정보를 토대로 다큐멘터리로 추진했다가 현실적 제약에 따라 경제 판타지 형태로 만든 것이라고 하니 논픽션과 픽션을 넘나든다. “경제에는 제대로 된 개혁이 한 번도 없었다… 유일한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고위 관료들과 퇴임 관료들이 각자 저마다 자신들만의 성을 차려놓고 영주 노릇을 한다는 것”이라는 게 작가의 말이다.
작금의 KB금융 사태가 딱 그 꼴이다. 외견상으로는 국민은행 주 전산기 교체 문제가 발단이 됐지만 본질적으로 낙하산 인사와 모피아에 의한 관치금융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서로 다른 연줄을 타고 내려온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 간 내부 권력다툼이 확대되면서 임 회장과 금융 당국의 정면충돌로 비화됐다. 국민은행장은 링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지주 회장, 금융감독원장, 금융위원장 등 모피아 선후배 3인의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젠 잘잘못의 문제를 따지는 단계도 지났다. 지주 회장은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조직 분란을 초래하고 고객 신뢰를 저버린 데 대해 책임을 지는 게 도리다. 금융 당국의 초강경 대응과 특수부를 동원한 검찰의 가세로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울어진 모양새다. 더욱이 당국의 압박으로, 우군이었던 KB금융 이사회마저 사실상 자진사퇴를 권고하기로 했다니 링 밖으로 내려오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가 퇴진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KB 사태를 둘러싸고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 금융 당국의 책임론도 반드시 짚어야 한다. 사태를 조기 수습하지 못하고 동일한 사안에 대해 중징계→경징계→중징계로 번복하면서 혼란을 야기한 금감원. 사태를 방관하다 뒤늦게 불똥이 튀는 것을 막고자 같은 사안에 ‘괘씸죄’까지 적용해 중징계 수위를 이례적으로 상향한 금융위.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임 회장 몰아내기에만 급급한 금융 당국의 무원칙과 무능함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상처투성이가 된 금융 당국 수장들의 권위도 동시에 추락했다.
당국 책임지고 처방 내놔야
금융 당국이 청와대와 핵심 실세, 정치권의 눈치만 살핀다는 소문이 나돈 게 어제오늘이 아니다. 정권의 하수인으로 영주 노릇만 하려 든다면 금융산업 발전과 선진화는 요원할 뿐이다. 이번 기회에 관치금융 적폐를 일소해야 한다. 정부 지분도 없는 금융사가 정권의 전리품인 양 낙하산을 내려 보내는 고질적 관행부터 뿌리 뽑는 게 순서다. 낙하산의 중심에는 모피아와 정권 실세 측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모피아에서 파생된 금피아(금감원 출신)도 금융권 파워가 막강하다. 능력과 자질을 겸비했다면 모르지만 출세와 자기 이익만 도모하는 낙하산 인사는 이제 멈춰야 한다. 금융사 지배구조 문제에 대한 대수술도 필요하다. 한데 근본적 처방은 가능할까. 소설 속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박정태 산업경제센터장 jtpark@kmib.co.kr
[돋을새김-박정태] 관치금융이 초래한 KB사태
입력 2014-09-16 0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