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런 친일파 말로… 지금의 이중생 누구?

입력 2014-09-16 03:19
국립극단의 작품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는 탐욕에 찌든 친일 사업가 이중생의 몰락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중생의 사위 송달지 역의 한동규, 큰 딸 하주 역의 백지원, 아들 하식 역의 양한슬, 막내딸 하연 역의 이소영, 아내 우씨 역의 연운경, 이중생 역의 정진각, 이중생의 형 이중건 역의 김재건. 국립극단 제공

중절모를 머리에 올리고 지팡이 짚는 소리로 등장을 알리는 허세 가득한 사업가 이중생. 걸음걸이는 건들건들, 말투엔 자신감이 넘친다. 해방 직후, 어느 날 그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혐의는 횡령, 배임, 탈세, 공문서 위조…. 일제 강점기 악질적 친일파로 아들을 솔선해 징용군에 보내면서까지 축재했던 그는 시대가 바뀌며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철창생활을 시작할 위기에 처한다.

연극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는 탐욕의 화신인 이중생이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가짜 장례식을 꾸미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중생은 보석으로 잠깐 풀려난 틈을 타 고문변호사와 함께 자살극을 꾸미고 사위 송달지의 이름을 빌려 불법적으로 재산을 빼돌리려한다. 하지만 게으른 지식인이자 의사였던 송달지는 장인의 재산으로 무료 병원을 세우려 한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관을 박차고 나오는 이중생. 결국 그는 진짜 죽음을 택하고야 마는데….

국립극단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포문을 여는 이 작품은 ‘맹진사댁 경사’ ‘시집 가는 날’ 등 우리에게 친숙한 희곡 작품을 다수 발표한 극작가 오영진(1916∼1974)의 1949년작이다. 국립극단 관계자는 15일 “근현대 희곡을 통해 현대사회와 현대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점검해 보고자 마련한 기획”이라고 소개했다. 기획을 아우르는 주제는 ‘자기응시’다. 작품은 이러한 취지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60여년이 지난 현대인들에게도 허영과 탐욕,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고발은 여전히 울림을 갖는다.

가족 구성원간 가치관의 충돌 역시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주제다. 극에서 부친의 가짜 장례식 중 사할린으로 징용됐던 아들 하식이 10년 만에 돌아오고 이후 아버지와 대립하는 장면에선 한 가족 안에서 이념과 가치관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보여준다.

희극과 비극의 양면을 보여주며 시대를 풍자하는 모습은 주인공의 이름 ‘이중생’에서도 드러난다. 이중생 역에 배우 정진각(61)이, 이중생의 형 이중건 역에 김재건(67) 등이 나오는 등 관록의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연출은 최근 국내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중 한 명인 김광보(50)가 맡았다.

광복 직후 발표된 꽤 오래된 작품인데도 세련된 연출과 탄탄한 연기력 덕분에 극엔 활력이 넘친다. 곳곳엔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가 충분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지루할 틈이 없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와 수학능력시험 지문으로 등장할 정도로 당대 시대상이 투영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지난 57년과 77년, 2004년 이후 국립극단을 통해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것으로, 28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2만∼5만원(02-1688-5966).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