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일수] 대량화하는 성폭력범죄 대처하려면

입력 2014-09-16 03:47

문명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은 지구온난화나 생태계 교란과 같은 자연환경의 위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쟁, 질병 등 사회적 불안정과 그에 따른 국민들의 불안도 불길한 징조의 하나가 된다. 특히 대량으로 빈발하는 범죄현상은 국가권력의 한계와 무능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며, 결과적으로 국가와 사회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잠식해 버린다.

특히 강력범죄의 대량화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우리나라 전체 범죄발생률은 2008년을 정점으로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려 왔다. 하지만 성폭력범죄 발생 건수는 2003년 1만365건에서 2008년 1만5094건으로 무려 50%나 증가하더니 2012년에는 2만1346건으로 110%나 늘었다.

성폭력특별법,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등의 제정과 개정은 우리나라에서 입법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분야였다. 다양한 금지 목록의 추가, 형벌 가중 외에 신상공개, 전자발찌 부착 명령, 화학적 거세 외에도 수용처분과 같은 자유박탈적 보안처분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도 성폭력범죄가 수그러들기는커녕 대량 범죄로 진화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성폭력범죄는 성범죄와 폭력범죄라는 두 얼굴의 복합체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형사정책의 초점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애매하다. 만약 성폭력범죄에서 성을 전면에 내세우면 그에 대한 대책도 바로 성충동을 억압하고 제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사리에 맞다. 물론 성충동이 중한 처벌로써 억지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사책임의 요체인지, 아니면 치료받아야 할 성충동조절장애 내지 인격장애인지는 범죄학파들 사이에서도 오랜 다툼이 있어 왔다.

어쨌거나 성폭력범죄가 성충동범죄라면 성욕을 자극하는 각종 매체물의 사회적 통제는 물론 그것을 심리적으로 강제할 만큼 위협적인 강화된 성폭력특별법의 존치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 나아가 외국의 입법례처럼 보호감호처분, 사회치료교정처분, 성심리상담치료 같은 조치 등이 고려될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어떤 외국의 예처럼 성매매금지법의 적용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특구를 신설하는 것도 성폭력범죄 예방에 실효성 있는 조치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면 성폭력범죄에서 폭력성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이른바 ‘성 없는 성폭력범죄’의 착상이 합리적인 성폭력범죄 대책에 훨씬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우선 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물론 성범죄에 대한 여성·아동주의적 시각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성폭력의 범주도 현재의 비만에서 탈출할 수 있다. 예컨대 아내강간의 성폭력범죄화는 가부장적 남성본위 사회에서 양성평등사회로 나가고자 하는 여성해방운동가들의 오랜 전략적 성 담론 중 하나였지만 아내강간죄 도입으로 혼인의 성과 혼외의 성 사이의 신성한 경계가 무너지고, 부부간 성공동체도 성폭력 전투장으로 전락해 버릴 위험에 처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성문화가 침실을 폭력장화했다면 여성 위주의 성문화도 기분에 따라 침실을 폭력장화할 수 있다. 성폭력 법제에서 이 같은 불필요한 형법 팽창은 여기저기 눈에 띈다.

문화심리학적으로 인간은 두려움과 수치, 불안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을 악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성을 죄악시하거나 ‘악한 성’과 같은 신화에 사로잡혀 왔다. 그 신화 때문에 성폭력범죄의 입법과 형사정책은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거나 ‘성충동 본능’ 형이상학이나 ‘악한 성’ 신화의 포로가 되어 인간의 얼굴을 지닌 합리적인 대책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폭력범죄를 폭력범죄의 범주에 자리매김하고, 다른 일반폭력 또는 강력범죄와 마찬가지로 폭력·공격성을 억지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때 성폭력범죄도 일반 형사범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어 더 인간답고 합리적인 형사정책적 대응 전략만 가지고도 충분히 사회 안정을 기할 수 있으리라. 형사법률의 팽창만큼 범죄도 범람한다는 사실을 새삼 유념할 필요가 있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