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종학 PD가 출연자 임금 체불 문제로 고심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년이 지났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방송계의 불공정 관행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방송예술인들은 여전히 ‘갑을 관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외주제작사 스태프 A씨는 지난해 중순부터 6개월간 예능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지만 지금까지 임금을 받지 못했다. A씨가 제작에 참여했던 예능 프로그램은 올해 초 한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케이블 방송사는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제작사는 스태프들에게 “방영이 이뤄지지 않아 돈을 줄 수 없다”며 A씨 등 30여명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지난 1월 방송 제작 관련 외주업체 대표 B씨는 모 방송사 드라마 PD로부터 제작 참여 의뢰를 받았다. PD는 “기존 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교체하고 싶다”고 했다. B씨는 팀을 꾸려 촬영 현장을 찾아갔지만 그 PD로부터 “업체를 교체할 생각이 없으니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B씨는 장비를 빌리고 사람을 모으느라 수백만원을 썼지만 허사가 됐다. 따로 계약서도 작성해두지 않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지난 4월부터 예술계 불공정행위 신고를 받는 ‘예술인 신문고’를 운영 중이다. 지난 3월 개정된 ‘예술인복지법’에 따라 ‘불공정 계약 강요’ ‘출연료 미지급’ ‘부당한 방해·지시·간섭’ 등에 대해 신고를 받고 있다. 최근까지 접수된 피해 건수는 53건이었으며 이 중 한 건을 제외한 52건이 임금 체불 신고였다. 피해자 대부분은 방송 관계자들로 피해 금액은 2억5000여만원에 이른다.
방송 스태프들은 연극 등 타 공연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뢰를 받고 단기간만 일하는 방식이다. 일정한 직장 없이 매번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때문에 적은 금액이 체불돼도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 방송의 경우 외주 제작이 보편화돼 있어 외주 업체가 임금을 체불한 채 도산해도 원청 업체는 ‘나 몰라라’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업계에 만연한 구두계약 관행도 문제다. ‘갑을 관계’ 특성상 ‘을’인 스태프들이 계약서 작성을 요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다 아는 사람들끼리 무슨 계약서냐’는 안이한 인식도 팽배하다. 법률 지식이 부족하거나 ‘주변에 알렸다가 도리어 일감이 끊길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부당한 처우를 받더라도 속으로만 앓는 경우가 많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1일 방송 스태프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4대 보험과 연장근로수당 등을 의무화한 ‘표준계약서’를 제정했지만 실효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는 14일 “업계 분위기상 신고가 들어온 건수는 전체 규모에 비해 극히 일부분으로 본다”며 “관련 사안에 대해 여러 차례 문제가 제기되고 소송도 이뤄져 법조계 등 사회 전반에 인식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피해를 당하는 즉시 관련 기관에 적극적으로 알려 자신의 권익을 보호해 달라”고 당부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기획] 구두 계약… 임금 체불… 방송예술인, 여전한 ‘乙의 눈물’
입력 2014-09-15 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