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주제로 요즘 사춘기 학생들, 젊은이들, 부모님들, 선생님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상대적으로 가방끈이 긴 편인 내가 공부를 독려해주기를, 공부의 괴로움을 떨치게 해주기를, 공부법의 묘수를 알려주기를 기대하는 눈빛을 만나곤 한다. 공부가 바야흐로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시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내가 이야기하는 바탕은 항상 같다. “성적이 곧 공부는 아니다, 학교 공부가 꼭 진짜 공부는 아니다, 한 번 전공이 평생 가는 전공은 아니다, 학교 공부를 너무 잘하면 할 수 있는 일의 옵션은 줄어든다.” 이런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반가워하다가, 긴가민가하다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오간다.
여기에 보태어 “놀이와 공부는 짝꿍이다”라는 메시지를 더하면 솔깃해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부는 연애와 같다”라는 메시지에 이르면 한바탕 웃다가 설레는 표정을 짓는다. 다들 믿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왜 공부하는가’가 ‘어떻게 공부하는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내가 가장 강조하는 바다. ‘왜 공부하는가’에 대해 자신의 답을 가지면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는 저절로 따라온다. ‘왜’는 ‘어떻게’보다 훨씬 더 힘이 세다. ‘왜’에 대한 정의가 분명할수록 ‘어떻게’라는 방식에 대한 확신이 드는 것이다. 동기가 확실할수록 동력이 붙는 이치다.
우리 사회에서의 공부는 지나치게 ‘어떻게’에 치중한다. 공부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니 어떻게만 익히면 된다는 식이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좋아야 하고, 시험은 당연히 잘 쳐야 한다는 식이다. 성적과 시험에 치인 우리 사회의 비극이자, 잘못된 사다리 타기 사회가 제대로 고쳐지지 못하는 이유이자, 진짜 창조성이 발휘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에 대해서 부디 ‘왜’를 묻자. 모든 사람의 ‘왜’는 각기 다른 것이 정상이다. 인생의 단계 단계마다 공부하는 동기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나름의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움이 멈춘 삶은 이미 끝나버린 삶과 다름이 없고, 깨달음이 없는 삶은 살아갈 가치를 잃은 삶이며, 호기심이 발동되지 않는 삶은 생생함이 사라진 삶이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다양한 이유들이 우리 삶을 풍부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를 풍성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공부의 본연적인 질문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뜨겁게 물어야 할 질문이다. ‘왜 공부하는가?’
김진애(도시건축가)
[살며 사랑하며-김진애] 왜 공부하는가
입력 2014-09-15 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