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여성CEO 열전] (34) 이은희 녹십자의료재단 원장

입력 2014-09-15 03:58
이은희 녹십자의료재단 원장이 지난 12일 경기 용인 재단 건물 1층에 있는 자동화 검사실에서 검체 분류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전국의 2500여 병·의원에서 의뢰해온 1500만 건의 검체 검사가 이뤄진다. 용인=허란 인턴기자
지난 12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있는 녹십자의료재단(Green Cross Labs) 1층 자동화검사실. 커다란 원통형 기기 주변으로 작은 시험관 수천 개가 자동기기 위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혈액과 소변, 객담(가래) 등 환자들의 검체가 분류되고 있는 중이었다.

검사실 밖으로 나오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로비 한쪽 벽면에는 영국 출신의 유명 화가 줄리아 오피의 그림이, 다른 쪽에는 천장까지 이어지는 '페이퍼 가든'이라는 제목의 전시 미술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재단 건물 내부에서는 일본의 쿠사마 야요이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 10여점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작은 미술관을 연상케 했다. 동시에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물씬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이은희(53) 녹십자의료재단 원장의 아이디어가 십분 반영된 것이다.

“직원들이 대부분 분석하고 계산하는 좌뇌를 많이 사용하니까 감성을 느끼는 우뇌를 좀 쓰게 해보자는 마음으로 설치한 거예요.”

이 원장은 우리나라 최초·최대 임상검사전문기관의 수장이다. 일반적으로 병·의원 의사들이 청진기로 환자의 정확한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비율은 30%선. 나머지 진단은 환자의 검체를 통한 임상검사가 차지한다.

예를 들어 A병원의 한 환자가 신종 플루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된다고 하자. 재단과 계약을 맺은 A병원은 해당 환자 검체를 이곳에 보내 검사를 의뢰하면 24시간 안에 결과를 통보해주는 일이 재단의 핵심 업무다. 서울대병원 등 국내 대학병원 90%가 녹십자의료재단에 특수검사 등 각종 검사를 맡기고 있다.

“제 역할은 이곳에서 시행되는 모든 임상 검사가 정확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적시에 병·의원에 보고되는지 등과 더불어 연구·개발 업무를 총괄하는 거예요. 나아가 재단의 발전도 꾀해야겠지요.”

이 원장은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된데 대해 “하나님의 시나리오대로 걸어온 것 같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했다. 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부터 생소한 임상검사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뒤 녹십자의료재단의 수장이 되기까지 자신의 바람과 의지로 이뤄진 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통지표 같은 곳에 장래 희망을 적어 넣는 칸에는 엄마가 늘 ‘의사’라고 대신 써 넣으셨어요. 저는 ‘나중에 크면 의사가 되어야 하는구나’라고 당연하게 생각했지요.” 의대로 진학해 인턴이 끝나고 전공의 과정을 선택할 때였다. 안과나 소아과를 택하고 싶었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리면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진단검사의학이 임상병리학으로 불렸는데, 별로 선호하지 않은 분야였죠. 스승님이 권유하셔서 이 길로 접어들게 됐죠. 하지만 ‘기왕 이쪽으로 왔으니 열심히 해보자’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1990년 녹십자 의료재단 부원장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 계기 역시 스승의 권유였다.

2007년 4월. 재단 원장으로 발령 받았을 당시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덜컥 원장이 됐거든요. 공부하고 연구만 하는 ‘범생이’가 어떻게 연간 매출을 채우고, 직원들을 관리해야 할지…온갖 걱정이 앞서더라고요. 마치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리더로 지명 받았을 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라고 했던 그런 마음과 비슷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한테 지혜도 주시고 제 옆에 아론과 같은 동역자도 보내주세요’라고.”

7년이 지난 지금, 그는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임직원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 이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우선임을 깨달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일터 속 크리스천의 가치관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명확했다.

“제가 맡고 있는 이 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이라고 믿어요. 나아가 직무수행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하자 그는 ‘소금에 절인 김치’를 비유로 들었다.

“배추가 소금에 잘 절여졌을 때 맛있는 김치가 탄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절여진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씀에 순종하고, 선한 행동으로 말씀의 열매를 맺을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 향기를 통해 ‘기독교인은 저런 사람이구나’를 깨닫도록 만들고 나아가 ‘나도 예수를 믿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본을 보이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느냐고 이 원장은 강조했다.

모태신앙인 그는 “신앙의 뜨거움도 없고,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것도 잘하지 못한다”면서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을 준행하려고 아주 조금 노력하는 정도”라고 자신의 신앙관을 내비쳤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따른 순종의 열매에 대해서는 확신이 느껴졌다.

“내 뜻대로 일이 안 풀리고, 원하는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지나 종국에 서서 보면 항상 좋은 것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용인=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