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경 내 나이 서른에 들어섰을 때 기적처럼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하시고 나를 끌어안았다.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 군복을 벗고 세상에 나왔을 때 사업이라는 것을 시작하셨고 보기 좋게 실패하셨다. 아버지는 성공하고 싶어 했지만 늘 실패했고, 재기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로지 딸인 내가 판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진 날 아버지가 내게 부탁을 하셨다. 아버지 고향에 함께 가자고….
아버지와의 여행은 썩 내키지 않았다. 알코올중독이신 아버지는 분명히 술을 엄청 드실 것이다. 오고가는 차 안에서 주정은 없으실까?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물 때문에 마음 약한 내가 또 지고 말았다. 내려갈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아버지의 의지가 술을 며칠간 끊게 만들어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선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고엽제 환자였던 아버지가 술 없이 며칠을 보낸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를 요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였다.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벌어졌다.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잔치가 벌어졌고, 며칠을 주무시지도 않고 술을 드신 아버지는 술 취한 남자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거지를 버스 안에서 보여주었다.
그때의 내 심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외쳐볼까, 아니지 기사아저씨에게 차를 세워 달라고 하자, 차라리 여기서 내려 걸어서 서울 가자 등 등. 하지만 상상은 상상으로만 끝났다.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 자신만을 탓할 뿐이었다. ‘아버질 믿은 내가 잘못이다’를 수없이 되뇌면서 쏟아지는 울음을 참아냈다. 미움, 한숨, 불쌍함, 측은함 등 모든 것이 섞여 원망으로 쌓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검사에서 정치인이 됐다.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내게 ‘의원님 의원님’ 하면서 잘해주는 분도 계시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술에 취해 욕하는 분들도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보다는 덜하다’는 생각에 전혀 당황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이때마다 나를 깨닫게 하신다. ‘살려달라고 하는 소리다.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긍휼히 여기고 기도해드리자.’ 지금 마음 깊숙한 곳에 아버지가 계신다. 긍휼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읽으면서 무슨 마음인지 잘 몰랐었는데, 긍휼이 무엇인지 뜻이 잡힌다. 그런 날이면 하염없이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주셔서, 진짜 긍휼의 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로 인하여 얻었던 마음의 상처들, 그것은 내가 만들었던 상처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세상적으로 표현하면 나쁜 것이 없다. 자기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고 나쁜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의도를 내려놓고, 먼저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과거에 검사로서 늘 사람을 조사하고, 구속하고, 석방하고, 처벌하고,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수시로 물어봤다. ‘하나님 구속할까요, 하나님 석방할까요, 하나님 증거주세요, 하나님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면 그 안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증거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주기도문의 위력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범죄자를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억울한 하나님의 사람을 구하라고 메시지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난 꼼짝없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리=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역경의 열매] 정미경 (3) 정치인의 길 첫 덕목은 아버지께 배운 ‘긍휼’
입력 2014-09-15 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