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하나.
2011년 겨울과 2012년 봄 사이, 서울 강남경찰서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그가 문득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집회신고를 하러 서에 온 듯했다. 훤칠하게 생긴 젊은 남자였다. 종이엔 부당해고, 착취, 비정규직 같은 으레 집회 현장에서 보이는 말들이 쓰여 있었다. 난 수습기자 말기였다. 매일같이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집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되는, 그러니까 ‘농땡이 기술’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종이를 대충 읽고 꼬깃꼬깃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귀찮았다. 그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네고 자리를 떴다.
몇 달 뒤 그가 숨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뒤늦게 그의 트위터를 뒤졌다. 아이디가 빈센트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얼마 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반 고흐의 자화상으로 바꿨는데, 고흐처럼 짧은 생을 살다 떠났다. 한쪽에선 그의 주검을 열심히 팔고, 한쪽에선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 와중에 한 매체가 그의 죽음은 ‘진짜 어려운 현장 노동자를 위하지 않는 현실’과 ‘외로움’에 기인했다고 썼다. 난 그를 잘 모르지만 왠지 공감했다.
죽음 둘.
지난 4월 핀란드 출장을 갔다. 봄의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가는 헬싱키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휴대전화에 불이 나 있었다. 배가 침몰했는데 사람들이 안 나온단다. 현지 취재 일정을 전부 끌어당겨 급하게 처리하고 이튿날 비행기를 탔다. 상사에게서 ‘너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감’이라는 문자가 왔지만 나는 현장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텅 빈 기차 막차를 타고 컴컴한 도시에 도착하니 내 욕구가 정의나 의리나 열정 같은 게 아닌 관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도에서는 뼈를 후비는 괴로움과 추악한 인간 본성이 뒤섞여 괴상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먹어치웠다. 어떤 이는 커다란 운동용 가방에 구호물품용 컵라면을 쑤셔 넣고 있었다. 누군가는 실종자 가족들이 머무는 천막을 배경으로 V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려 여자화장실에 몰래 들어가 있던 기자가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왔다. 곳곳에서 기자들의 휴대전화와 노트북, 카메라가 부서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족들은 소돔과 고모라 같은 천막들을 등지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울었다.
죽음 셋.
불 탄 집의 잔재 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서울 청계천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화교사옥 쪽방촌에서는 오갈 데 없는 도시난민 마흔 명이 살았다. 그러던 중 지난 2월 난 불로 2명이 숨지고 건물의 절반이 탔다. 폐지를 주워 살던 여든한 살의 홀몸노인이 엄동설한에 연탄불을 갈다 실수로 불을 냈다. 남은 이들은 불법 점거자였기 때문에 위로금은 고사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갈 곳이 없어 이곳으로 돌아왔다. 불길에 그을린 붉은 벽돌담이 군데군데 이빨이 빠진 채 버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래서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처럼 위태로운 삶을 이어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잘못이라 했다. 돈이 없으면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지, 왜 도시에 들어왔냐고 질책했다. 집이 없으면 일을 해 돈을 벌라고 했다. 남들보다 덜 치열하게 산 대가라고 했다. 한 몸 가누기도 힘든 팔순의 노인이 어떤 노동을 해서 ‘합법적인 집’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보다 끈질겼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지난 삶은 통째로 부정당하고 있었다.
이달 초 옆집 아주머니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마당에 새끼고양이가 자리를 잡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부리나케 가 보니 정말로 갓 태어난 생명체가 색색대고 있었다. 장마가 이어진 사흘 내내 비를 쫄딱 맞았는지 모양새는 진흙 덩어리에 가까웠다. 어미로 추정되는 노란 길고양이는 그간 우리 집 마당에서 매일 밥을 먹었다. 최근 들어 배가 불러 보인다 싶었는데 옆집 마당에 자리를 잡고 새끼를 낳은 모양이었다. 집으로 데리고 돌아와 애지중지 하루를 보냈다. 새끼 고양이는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고양이용 분유를 잔뜩 먹고 통통해진 배로 수면양말을 끌어안은 채. 이튿날, 대문 앞에 죽은 새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지인은 “어미가 고맙다고 두고 갔나 보다”고 했다. 맞다, 고양이는 보은(報恩)하는 동물이라 했다.
합리와 효율 같은 개념들이 너무 팽배해서 인간이 껴들 틈이 없다. 말단 노동자에서 중간 관리자가 된 이들이 악덕 사장 흉내를 내고, 자식을 잃고 넋이 나간 부모들에게 ‘국가전복세력’이라는 조롱이 돌아온다. 각박해진 세태가 안타깝다.
정부경 사회부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