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르포] 메마른 영성의 우물, 빈민촌에 복음의 물길

입력 2014-09-13 03:13
미얀마 양곤 바고강 옆 빈민촌은 한국의 고시원방 크기의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조은길 선교사와 담소하고 있는 남편을 창살 너머로 바라보는 미얀마 여성이 미소 짓고 있다.
조은길 선교사는 미얀마 정부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아 ‘새생명어린이집’을 설립했다. 30여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꿈을 키우고 있다. 어린이들과 함께한 조 선교사.
빈민촌 도로 포장을 지원한 강석근 목사의 기념석.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10일 멀리 미얀마 양곤에서 온 조은길(62) 선교사를 다시 만났다. 지난달 20일 양곤 빈민가에서 동분서주하던 모습 그대로 그의 한국 일정도 바빴다. 최근 ‘내가 살아야 하는 진짜 이유’(쿰란출판사)라는 책을 펴낸 것도 바쁜 이유 중 하나다. “2006년 파송 받은 후 한국에서 추석을 지내는 건 두 번째”라고 말했다. 조 선교사는 부인과 세 딸을 한국에 남기고 8년 전 홀로 미얀마로 부임했다.

40여년 전 청계천 판자촌 같은 빈민촌 선교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 지리라.”(잠 11:25) 양곤 빈민가에서 조 선교사와 함께하며 그에게 그런 축복이 주어지길 바랐다. 그 양곤시내 바고강가 빈민촌은 우리가 겪은 1960∼70년대 서울 청계천 모습이었다. 현재 청계천8가에 가면 그 가난했던 시절 판잣집을 재현해 놓았다.

지금 미얀마는 우리의 40여년 전 ‘청계천 빈민가 삶’이다. 모든 게 부족하다. 복음의 우물도 말랐다. 파인 아스팔트길을 어슬렁거리는 개들도 삐쩍 말랐다.

그 20일 밤, 바고강 옆 빈민촌은 마치 한국의 고시원방 넓이 정도의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거대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부분 강가의 오염된 진창 위에 말뚝을 박고 지은 집이었다. 건·우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수상가옥 형태로 짓지 않으면 안 된다.

조 선교사가 마을길에 들어서자 길 양쪽 문도 없는 집에서 불쑥불쑥 사람들이 나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조 선교사는 그때마다 익숙한 미얀마어로 반갑게 대화를 나눴다. 가정마다 20와트 전구 하나에 밤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열 집 가운데 두 집꼴로 양초를 쓰고 있었다. 그 양초로 인한 판잣집 화재도 빈번했다.

“저기 우뚝한 화재감시탑 보이시죠? 먼 얘기 같지만 우리나라도 저런 화재 감시망루를 세워놓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던 때가 엊그제입니다. 다행히 한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속박과 전쟁, 가난으로부터 벗어난 거죠. 그런 세월을 고스란히 겪으며 살아왔어요. 제 스스로도 이런 축복이 믿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와요.”

인사하기 바쁘던 그가 “여기 한번 보시죠”라고 기념석 하나를 가리켰다.

‘기쁨넘치는교회(전주) 김영주 목사 2012년 12월 25일’.

무릎 높이의 비석엔 한글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가 한참 가다가 또 다른 기념석을 보여줬다.

‘예성교회 강석근 목사 2010. 8. 15’ ‘광주 동명교회 2011. 11. 15’.

이 먼 곳의 한글 기념석은 빈민촌 사역을 돕는 한국교회 손길의 표식이다. 예성교회(전주) 강 목사는 이 표석을 남기고 안타깝게도 이듬해 소천했다.

“지금 딛고 계신 시멘트 포장길은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실크로드와 다름없습니다. 포장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와 오폐수가 뒤섞인 진창이었거든요. 제가 처음 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한 발짝도 제대로 떼지 못했어요. 그들은 그 진창길을 궁여지책으로 대나무를 깔아 다녔어요. 하지만 그것도 비 오면 말짱 헛일이었지요.”

그는 한국교회 지원 요청에 앞서 자비를 들여 마을길 포장에 나섰다. 마을 중앙의 포장길은 그가 처음 미얀마에서 시작한 ‘새마을운동’이다. 본명 조명택이 조은길로 바뀐 것도 이 길을 닦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을 위한 ‘좋은 길’이 되기를 그는 소망하고 있다.



전역 후 선교, 세 딸이 십일조로 도와

2006년 7월 그는 광주광역시 동명교회 동역선교사로 파송받아 미얀마 양곤에 도착했다. 27년간 군생활을 마친 퇴역 장교로 예비군 중대장 등을 하며 선교사 준비를 해왔던 그였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라는 말씀만이 유일한 힘이었다.

“양곤에 도착, 미리 배운 서툰 미얀마어로 제일 어려운 빈민가로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그곳이 여깁니다. 한 한국 선교사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마을길을 포장하겠다고 하니 반신반의한 것은 당연했죠.”

조 선교사의 선교 방식은 남달랐다. 공사할 돈을 주고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사 자재를 사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땀 흘려 일을 했다. 현지 사람들이 완공까지 같이 일하는 그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같이 일하다 보면 마을 사람들은 “예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인(聖人)인가요?”하고 묻는다. 그러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전도한다.

가난은 교육 기회의 부재와 질병을 가져온다. 조 선교사는 마을 사역 후 미래 세대를 위해 고아원을 세웠다. 민족 간 분쟁으로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도 분쟁지역인 국경까지 달려가 데려왔다. 마치 70년대 청계천 빈민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83) 목사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 바고강 빈민촌에서 좀 떨어진 유센나 유예 묘도라는 지명의 서민 아파트. 그곳의 49㎡(15평) 남짓한 아파트 3채는 조 선교사가 주력하는 고아원 ‘새생명어린이집’이다. 몇 년 전 미얀마 정부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다. 전쟁고아 등 30여명의 아이들은 바로 이곳이 집이다. 굶지 않고, 교육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비둘기집’이다. 십자가와 성령이 그들을 지킨다.

아이들은 인근 초·중·고등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집 아이들’로 소문이 자자하다. 반에서 1등이 대여섯명이다. 눈 부비며 새벽 경건회로 시작하는 ‘일찍 일어나는 새(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들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과거이자 그들의 미래다.

조 선교사가 9년째 미얀마에서 하는 일은 ‘크리스천 새마을운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고아원을 주축으로 유치원, 방과후 아동 지도, 빈민아동 자매결연, 길포장, 다리 공사, 우물 파주기, 정수기 공급, 교회 개척, 한국 유학 주선, 미얀마어학원 운영 등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는 사역을 하고 있다. 10여명의 현지 스태프가 그를 돕고 있다.

“하나님께서 장년의 나를 선교사로 내보내시려고 군 시절 체력을 기르게 하고, 군인연금을 타게 해 선교비로 쓰게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제가 못 갈 곳은 없어요. 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세 딸이 미얀마 선교를 위해 십일조를 합니다. 저는 미얀마 미종족 전도를 위해 더 깊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양곤(미얀마)=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