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비관에 빠진 사회 초년병들

입력 2014-09-12 03:54

3년차 직장인 김모(26·여)씨는 지난 7월 직장에 사표를 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월 400여만원을 받으며 모자라지 않는 생활을 하던 차였다. 김씨는 그러나 직장 생활 중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껴 좌절했다고 한다. 그는 “몇 십년간 저축해도 서울 시내 아파트 한 채도 못 사는 건 물론이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을 재산도 없으니 내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고 11일 퇴사 이유를 설명했다. 김씨는 현재 퇴직금으로 중남미 국가를 여행 중이다.

직장인 최모(26)씨는 “서른다섯 살에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국내 굴지의 건설사에 다니는 최씨가 퇴근 후 향하는 곳은 서울 이태원 유흥가의 술집과 클럽이다. 그는 “월급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쓴다”면서 “인생이 쳇바퀴처럼 흘러갈 게 뻔하기 때문에 젊을 때 신나게 놀다 죽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오랜 학창생활을 지나 갓 사회에 입문한 일부 20대 사이에 염세·비관주의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이들은 “치열한 경쟁 끝에 어렵게 취업문턱을 넘어도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고 좌절 이유를 설명한다.

지난 8일 서울의 한 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어차피 노력해도 안 된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도 부자들의 노예처럼 사는 건 똑같다”며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라고 썼다. 이 글에는 200여개의 동조 댓글이 달렸다.

1970, 80년대에도 전 세계적으로 히피(Hippie)식 염세주의 바람이 불었다. 당시 젊은이들이 자유와 평화를 외치며 규제에 항거했다면, 요즘에는 현실에 절망하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낮추는 성향이 크다. 이들은 고소득층 부모에게서 건물 등을 물려받은 자녀들을 ‘금수저’라고 칭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한다. 어렵게 취업에 성공해도 천편일률적인 기업 문화에 절망하며 쉽게 사회에 자리를 잡지 못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405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올해 신입사원 채용실태 조사 결과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25.2%에 달했다. 4명 중 1명은 어렵게 입사한 회사에서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나오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행복해진다’는 말도 옛말이 됐다. 지난 4월 서울대 보건진료소가 발표한 2013년도 학생정기건강검진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4304명 중 12.8%(551명)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우울과 절망(55.4%), 학업 문제(26.1%), 취업 및 진로 문제(23.7%) 등이 꼽혔다. ‘단기 알바’를 전전하며 눈앞의 생활고만 해결하는 ‘니트(NEET)족’도 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지난해 내놓은 세계청년고용동향 보고서를 보면 국내 니트족 비율은 19.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5.8%)을 훌쩍 넘어섰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