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덕분에 당신은 책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500쪽이 넘는 책 ‘종이의 역사’(21세기북스)는 책갈피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자신감대로 이 책은 종이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인간 문명에 혁명을 가져온 종이의 발명부터 사회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 여기에 종이를 만들고 수집하는 사람들까지. 책을 주제로 하는 3부작 중 두 권 ‘젠틀 매드니스’와 ‘찬란한 문자’를 쓴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가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가 썼다.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영국 소설가 이언 샌섬이 지은 ‘페이퍼 엘레지’(반비)다.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종이의 역사’가 묵직한 쪽수에 걸맞는 대작 다큐멘터리라면 ‘페이퍼 엘레지’는 날렵한 에세이다.
디지털 시대, 종이의 미래에 관한 비관적 전망도 적지 않지만 두 책은 모두 종이의 미래를 낙관한다. ‘종이의 역사’에서는 오늘날 종이의 상업적 용도는 약 2만 가지이며 미국의 한 제지공장에서 생산되는 종이 제품만 1000종에 이른다는 점으로 미뤄 “우리 사회에 종이가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일각의 예측은 당장은 들어맞지 않을 듯하다”(14쪽)고 말한다.
‘페이퍼 엘레지’는 우리는 종이로 된 세상에 살며, 종이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보자.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변을 본다. 그런데 화장지가 없다. 차는 티백 없이, 커피는 커피 필터 없이 마신다. 전철 타러 가는 길에 신문을 안 산다. 사실 돈(지폐)도 없다. 사무실 벽에는 벽지도 없고 가족사진도 없다. 이메일을 프린트하거나 서류를 폴더에 정리할 일도 없다.
그는 종이가 사라질 경우 있음직한 일들을 잔뜩 적은 후 이렇게 말한다. “잠깐이라도 종이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라. 무얼 잃게 될까?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다”(13쪽).
‘종이의 역사’는 2000년전 중국에서 발명된 후 인류와 함께한 종이의 역사를 담았다. 종이는 이후 이슬람 학자와 수학자에게 이상적인 기록 매체가 돼 중동을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2세기 스페인을 거쳐 유럽으로, 14∼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탈리아로 전해졌다. 북아메리카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머지 모든 지역으로 전해지기까지의 긴 여정도 상세히 소개된다.
저자는 역사적 접근뿐 아니라 중국·일본의 전통 제지 공장을 직접 찾아가 종이가 얼마나 많은 수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미국 달러를 비롯해 전 세계 지폐 용지 생산의 60%를 담당하는 제지업체 크레인 앤 컴퍼니 르포는 현장감을 더한다. 정지현 옮김.
‘페이퍼 엘레지’에서 저자는 종이와 관련한 인류 문화사를 서술하며 종이 제작의 복잡한 공정과 광범위한 역할에 대해 찬탄한다. “중요한 일은 모두 종이 위에서 일어난다”고 말하는 저자는 지도와 지폐, 건축, 장난감, 종이접기, 영화에 이르기까지 종이의 쓰임새에 대한 주제별 분석을 시도한다. 곳곳에서 보여주는 날카로운 문학적 감수성은 책 읽기를 흥미롭게 만든다. 홍한별 옮김.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
[책과 길] 인류 문명과 운명 공동체… 종이는 영원하다
입력 2014-09-12 0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