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석방 문제가 동북아 정세를 뒤흔들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억류 미국인을 고리로 북·미 접촉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우리 정부도 주도권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기민하게 대응하는 모습이다.
우리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황준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글린 데이비스 미측 6자회담 수석대표와 면담한 뒤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억류 미국인 석방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북한에 촉구했다.
황 본부장은 기자들과 만나 “한·미 양국은 협의에서 북한이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고 국제사회와 진정으로 협력하고자 한다면 먼저 비핵화에 나서야 하고 남북관계 개선에도 전향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이같이 밝혔다. 한·미 6자회담 수석대표가 이산가족 상봉, 억류자 석방 문제를 특정해서 거론한 것은 이례적이다. 두 문제를 ‘인도적 사안’으로 묶어 북한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다.
우리 정부로선 한·미 간 긴밀함을 북한에 과시하려는 포석이 다분하다. 황 본부장의 이번 방문은 추석 연휴를 앞두고 갑자기 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황 본부장은 “한·미 양국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유엔총회 등 주요 일정에서도 협력해나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북·미 간 억류자 석방교섭 상황에 대한 질문에는 “북한 문제 전반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만 말했다.
미국도 일단은 우리 측과 손발을 맞추는 모습이다. 마리 하프 국무부 부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북·미 간 석방교섭 상황과 관련, “특별히 새로운 사항은 없다”며 “북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미국인 억류자들을 석방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청한다”고 강조했다. 젠 사키 국무부 대변인도 전날 “북한 당국과 접촉할 계획이 현재로선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달 초만 해도 대북 특사 파견 등 어떤 옵션도 배제하지 않겠다던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억류 미국인 세 명 중 한 명인 매튜 토드 밀러(24)씨에 대한 재판을 14일 진행하겠다고 예고해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북한은 재판에서 밀러씨가 ‘적대행위’를 했다며 형을 선고하고 이를 공개할 것으로 보인다. 그 전까지 미국의 호응이 탐탁지 않을 경우 강도 높은 형을 선고할 수 있다. 북한은 2012년 11월 입북했다가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46)씨에 대해 지난 5월 국가전복음모죄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한 바 있다.
이처럼 북한이 미국과의 접촉에만 매달리면서 우리 정부의 남북 고위급 접촉 제안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달 정부 제안이 있은 뒤 11일로 한 달째가 되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추석 당일인 8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망배단에서 열린 이산가족 합동 경모대회 축사를 통해 우리 측 고위급 접촉에 대한 북한의 호응을 거듭 요구했다. 정부 소식통은 10일 “북·미 관계만 신경 쓰지 말고 남북관계 개선에 호응해 나오라는 입장을 피력한 것”이라며 “한·미가 보조를 맞추고 있는 만큼 대미 압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북한이 우리 측 고위급 접촉 촉구에 호응해올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북한도 고위급 접촉에 응하지 않는 것만 빼고는 근래 들어 남북관계 개선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박봉주 내각총리는 9일 열린 정권수립 66주년 기념 중앙보고대회에서 “가로놓인 난국을 타개하고 북남 관계를 개선해 조국 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
한·미, 북에 ‘이산 상봉·억류자 석방’ 촉구
입력 2014-09-11 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