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신 일은 세 번 있었다. 그 하나는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한 뒤 갈릴리 쪽으로 올라가시다가 나인 성에서 장례 행렬을 멈춰 놓고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이고, 다음은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을 물리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건너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이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그 세 번째였다.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먼저의 두 사건은 갈릴리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유대인들은 그저 풍문으로만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러나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린 것은 감람산 너머 바로 지척에서 일어난 표적이어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식된 것이었다. 즉 나사로 사건은 예수를 죽이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는데 마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구술을 마가가 받아썼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이 중요한 사건을 마가에게 불러주지 않았을까? 베드로의 생각에, 제자들이 일제히 반대하여 베다니로 따라가지 않았던 것은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은혜롭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이었을까? 마가의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쓴 마태복음 역시 이 일에 침묵하고 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요 11:12)
삼년이나 따라다닌 선생님께 그리도 무엄하게 대꾸했던 제자들을 도대체 누가 선동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자세히 살폈다는 누가도 그것을 쓰지 못하고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만을 조심스럽게 삽입해 놓았다.
“이미 기록된 세 복음서가 널리 유통되고, 그 사본이 요한의 손에도 들어왔다.”(유세비우스 ‘교회사’ 3-24)
결국 요한은 예수께서 떠나신 지 60년이나 지나서 요한복음을 썼고, 나사로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적어서 남겼다. 필자는 소설 ‘제국과 천국’에서 평소 시기심이 강하고(눅 9:49) 야망이 컸던(막 10:37) 요한이 ‘갈릴리 출신’인 제자들을 선동해 ‘유대 출신’ 나사로를 따돌리게 했던 것으로 설정했었다. 만약 예수께서 혼자 베다니에 가셨다면 언제 그들과 합류했을까?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에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시니라.”(요 11:54)
이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실족’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17:1∼2)
뭔가 강력하게 나무라고 경고하는 듯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
그리고 다시 종의 자세로 겸손하고 헌신할 것을 강조하신다.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바리새인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질문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주는 대답을 통해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회개하면 용서하겠노라고 하셨는데도 제자들은 회개할 생각은 안 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는 오히려 아이들을 불러 안으시며 말씀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세 번째로 말씀하셨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 18:31)
예루살렘은 이미 ‘아리엘’ 즉 ‘번제단’으로 정해져 있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고 했던 곳을 생각하고 계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그리고 ‘제삼일’에 그곳이 보였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3)
헤브론에서 모리아 산까지의 사흘 길은 아브라함에게 흑암의 길이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었다 하나 그의 마음은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제삼일에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 22:11)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눅 13:3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그 모리아 산의 바위는 예루살렘에 있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
그는 아리엘이 된 예루살렘을 안타까워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
그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세 번째 예고는 전보다 더 구체적이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께 나아와 자기네 형제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탁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날 때에 그분을 만나 인생이 바뀐 사람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그분을 외쳐 불러서 눈을 뜨게 된 소경 바디매오(막 10:46)와 그분을 보려고 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가 부름을 받은 세리장 삭개오(눅 19:5) 뿐이었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8)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③
입력 2014-09-12 0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