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 사건이 있은 지도 3주가 지났다. 이제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그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소수의견이라도 경청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돼 필자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보려 한다.
50대 현직 검사가 상당히 늦은 밤에 7차선 대로를 향해 해보였던 행동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의 비이성적·충동적 일탈행위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은, 혹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을 계도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바로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검찰은 공연음란죄(公然淫亂罪) 기소 의견으로 경찰로부터 송치된 그 남성을 조사하고 있다. 그가 공연음란죄를 저질렀는가는 법정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지금은 그가 불쌍한 환자로 보인다. 필자가 불쌍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가 많은 학식과 보통사람이 가질 수 없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그를 구원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그의 몸서리치는 ‘나 홀로’가 필자의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존재다. 사랑할 수 없거나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고독한 상태, 즉 ‘나 홀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필자는 여기서 ‘나 홀로’를 사랑의 결핍이 가져다주는 고독한 상태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사랑이 없어 홀로된 사람은 그 ‘나 홀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나 홀로’, 그것이 그 사람의 충동적 일탈행위의 원인이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철저한 고독의 몸부림으로 봐야 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애정을 주지 않으니까 사랑을 받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러한 시도들이 다 실패한 끝에 다다른 것이 바로 그 행동인 것이다. 그것은 왜곡된 사랑의 애걸 행위요, 사랑에 목마른 자의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사랑이 결핍된 사람은 다 그런 행동을 보이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아무리 고독한 사람도 그러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정상인으로서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비정상적인 행동이요, 반사회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병적인 것이다. 병의 증상인 것이다.
필자는 정신의학을 잘 모른다. 따라서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그를 환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이 지극히 병적인 것으로 여겨지기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반사회적 일탈 행위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것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는 작은 컴퓨터를 우리 손안에 안겨다 주었다. 그 작은 문명의 이기는 우리 생활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지만 또한 폐해 역시 만만치 않다. 스마트폰을 열어 볼 때마다 무작위로 무차별하게 쏟아지는 외설스러운 문자와 이미지가 사람의 망막을 자극하고 뇌세포를 흥분시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인상과 체험들을 만들어내었다. 이런 상태가 일상화되다 보면 성에 대한 건전한 판단력을 상실하게 되고 통제되지 못한 성적 욕망에 집착하다 보면 외설의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익명성으로 탐닉하던 밤의 세상과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것이다. 관음증(觀淫症)의 객석에서 관객으로 앉아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관음증의 무대 위에 뛰어올라 주인공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관음증에 포로가 된 우리 사회가 배태하고 배양하고 길러낸 신종 환자이다.
이와 유사한 사건의 재발 방지와 사회 안정성 유지를 위해서 그는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고립되고 파괴적인 성(性)으로부터의 탈출을 돕는 도움의 손길이 더 시급하다.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과 다가가서 안아주는 열린 마음만이 그 영혼을 구원할 것이다. 타락한 성은 오직 타락한 인간이 구원받을 때만 그 치유가 가능한 것이다.
김덕규 동아대 의대 교수
[김덕규 교수의 바이블 생명학] 지탄받는 검사(檢事)를 위한 변론
입력 2014-09-06 0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