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 어지간히 왔다. 때는 가을이고 추석도 곧 발밑에 와 있다. 과일들이 당도를 채우지 못해서 주인들이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큰 덩치의 과일들이 상점에 나와 있는 걸 보면 계절은 모두 제몫을 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과 하나를 먹어 본다. 생각보다 꽤 당도가 높다. 그 빗줄기 속에서도 이 사과는 제 할 일을 다 했다. 물론 주인들의 수고가 이 하나의 사과에 미치고 있었겠지만 사과 하나를 들고 생각한다.
이 사과 하나가 열매를 맺고 봄을 지나 여름을 지나 가을에 당도하기까지 지난 우리나라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들 속에서 실속 없이 시끄럽기만 했다. 무엇을 시작하고 무엇을 끝냈는지도 모르고 신문과 TV는 소음 수준의 말들만 쏟아 내었다.
그래서 무엇으로 결말이 났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니 어떤 쪽으로 우리가 가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그런 미로 같은 세월 속에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제자 하나가 전화를 했다. 그는 대뜸 첫마디로 시 한 구절을 외며 까르르 웃는다.
“인제는 거울 앞에 선 누님이 돼야 할 때에요.”
그때 생각했다. 지난 봄여름 동안 우리는 너무 얼굴 없는 얼굴들을 바라보며 살았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김엄마’ ‘신엄마’ 뭐 그런 말을 들으며 그 신록의 봄을 녹음천지를 대충 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는 그야말로 ‘인제는’이란 말에 힘을 주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가 아닌가. 봄에는 소쩍새가 여름에는 천둥이 모두 가을국화를 피게 하는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는/ 먼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국화 한 송이가 피기 위해 천체가 움직이고 사계절이 모두 움직였듯 사과 하나가 우리들 앞으로 돌아오기까지 하늘과 땅이 그리고 모든 자연이 쉼 없이 움직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시간이 간다는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말이다. 물어야겠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행동으로? 거짓은 없었는가? 중요한 것은 지금은 가을이라는 것이다. 하늘을 바라볼 준비는 되어있는지 이 가을은 그 어떤 가을보다 다르게 국민적 수준에서 각자가 거울 앞에서 천천히 자신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질서와 새 힘을 가동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달자(시인)
[살며 사랑하며-신달자] ‘인제는’ 거울 앞에 설 때다
입력 2014-09-05 0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