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재미있는 말을 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인플레이션이 지니(병이나 램프 속에 사는 요정)라면 디플레이션은 오거(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나 거인)”라고 정의했다. 인플레이션이 지니처럼 경제를 살리는 요정이라면 디플레이션은 경제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비유다. 출구전략(경기 부양을 위해 풀었던 돈을 거둬들이는 정책)을 만지작거리던 미국 등에 일침을 놓은 것이다.
우려는 차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라가르드의 오거’는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유럽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고약한 냄새를 피우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한 포럼에서 이미 우리나라가 디플레이션에 진입했다고 선언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12년 11월 1.6% 이후 21개월째 1%대다. ‘잃어버린 20년’(1992∼2001년) 동안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평균 0.43%였다.
저성장과 저물가로 요약할 수 있는 디플레이션은 ‘소리 없는 암살자’다. 부지불식간에 경제에서 활력을 빼앗아간다. 돈 가치가 오르면 소비자들은 가격 하락을 예상하고 소비를 늦춘다. 매출과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기업은 투자를 하지 않는다. 소비와 투자 감소는 생산 위축, 고용 감소, 임금 하락을 부르고 실업과 소득 감소는 수요를 위축시켜 다시 가격 하락을 유발한다. 이 악순환이 ‘디플레이션 소용돌이’다. 디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을 부르는 상황에 이르면 공황이라는 파국이 가까워진다. 미국의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경제 전 영역에 걸친 파산 이후에야 상황이 안정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정부와 시장은 경기 움직임에 민감하다. 디플레이션이 오지 않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금리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쓰레기통을 들여다보거나 동네 세탁소 손님 수를 관찰하곤 했다고 한다. 가정에서 내놓은 쓰레기 양이 많아지거나 세탁소에 옷을 맡기는 사람이 많으면 경기가 좋아지는 신호라고 본 것이다.
경기 움직임을 보여주는 지표 중에 ‘립스틱지수’라는 것도 있다. 이 지표는 세계적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 로더의 이사회 의장인 레너드 로더가 2001년 제시했다. 당시 9·11테러 이후 소비 활동이 극심하게 줄고 간접 경제 피해가 50억∼100억 달러에 달했는데도 립스틱 판매량이 증가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자 가격이 낮은 상품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소비가 일어난 것이다.
최 부총리도 나름의 근거와 감각을 바탕으로 ‘디플레이션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의 발언에 담긴 진짜 의미가 이미 디플레이션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고백인지 아니면 앞으로 진입할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경고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경제의 처지가 곤궁하다는 점은 명확하다.
흔히 경제는 심리라고 한다. 시장은 심리에 가장 먼저 반응하고, 심리가 시장을 지배한다. 불안은 순식간에 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 또한 경제는 정치이기도 하다. 정치 활동으로 이뤄지는 주요 정책과 법안이 경제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지금 ‘최경환 경제팀’에 필요한 것은 강력한 정치력과 빈틈없는 심리전이다. 1%라도 디플레이션 위험이 있다면 방어막을 쳐야 한다. 쇼도 하고, 겁도 줘야 한다. 필요하다면 최 부총리가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서라도 적극적 투자와 고용, 소비를 이끌어내야 한다. 일본이 겪은 20년의 고통이 어떤지 생생하게 지켜본 것으로 충분하다.
김찬희 산업부 차장 chkim@kmib.co.kr
[뉴스룸에서-김찬희] 립스틱 짙게 바르고
입력 2014-09-05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