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광야생활로 거지 나그네가 다 된 시점, 칠레 북부 항구무역도시 안토파가스타에 도착한 것이 2009년 5월이었다. 바닷바람이 거세던 늦은 밤, 거리를 방황하다 조그만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찬송 소리를 들었다. 본능적으로 들어가 뒷자리에 앉았다. 지친 몸과 마음에 쉼이 필요했다.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았을 뿐인데 고단했나 보다. 한 남성이 내게 왔고, 자다 깨 정신없던 내게 온화한 미소를 던졌다.
“형제님, 많이 고단하셨나 보군요. 어떤 연유에서 우리 교회까지 오시게 된 건지 얘기는 차차 듣도록 하고, 일단 푹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가면 좋을 것 같군요. 이곳에서 이렇게 자면 식사도, 씻는 것도 불편할 것 같아서요.”
지금 이 순간 볼품없기 그지없는 나를 그들은 내쫓는 대신 손을 내밀어 주었다. 한국에선 경험하기 좀체 힘든 실로 묘한 감동이었다. 손을 내밀어준 신도들과 함께 어디론가 향했다.
“환영한다, 네 얘기 전화로 미리 들었어!”
“용감한 한국 청년, 아미고(친구), 반갑다!”
안토파가스타에서 대학을 다니며 한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었다. 학생들의 엄마인 하숙집 주인 엘렌 여사는 이방인을 반갑게 맞으며 따뜻한 저녁식사부터 내왔다.
이들은 복음주의교회 청년부 소속 멤버들이었다. 그들은 낯선 나를 배척하지 않고 친구라고 먼저 불러주었다. 마치 예수님이 오래전부터 나를 택하셔서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은 이미 나를 친구로 여겼던 것이다.
뜻밖의 호의로 쉼을 누리는 건 감사 중의 감사였다. 이들과 탁구를 치고, 고전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식탁 위의 교제를 나눴다. 무엇보다 매일 저녁 함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이들에게는 교회가 그저 폼 나는 액세서리가 아니었다. 청년들과 드린 세 번의 예배는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됐는지를 반추하는 결코 가볍지 않는 묵상의 장이 되었다.
“안토파가스타는 정말 사랑스러운 도시야. 이렇게 좋은 친구들도 있고. 브라더 문, 복음을 위해서라면, 혹 칠레 청년들에 대한 마음이 생긴다면, 너도 우리와 함께 살지 않을래?”
제법 진지한 대화는 며칠간 이어졌다. 심성이 참 고왔다. 나를 그저 지나가는 뜨내기로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칠레 내 스페인어 학업과 이곳에서 선교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말하자면 텐트 메이커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도 열렬한 설득을 아끼지 않았다.
“너희들하고 지내면 참 좋을 것 같아. 그런데 난 선교에 대한 꿈은 있지만 선교사에 대한 소명은 없어. 그래도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아와 교제하고 싶어.”
“하나님께서 너의 길을 준비해 놓으셨을 거야. 용기 잃지 마.”
떠나는 날 아침, 엘렌이 고단한 여정을 감내해야 하는 내게 선물을 줬다. 다름 아닌 미군 전투식량 두 상자.
“용기 잃지 말고 완주해서 나중에 멋진 소식 전해주길 바란다. 갓 블레스 유.”
모두 집 밖으로 나와 뜨겁게 안아주며 배웅해 주었다. 뭔가 머리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슴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신학적 지식은 왕성해졌으나 삶으로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더 퇴보해진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들과의 만남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언제 다시 안토파가스타의 그 열렬한 그리스도 안의 우정의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품은 칠레 북부 광야는 그래서 지금도 마냥 그리운 곳이다.
문종성 (작가·vision-mate@hanmail.net)
[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23) 칠레 북부 항구무역도시 안토파가스타에서
입력 2014-09-06 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