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읍교회 세움간판이 한적한 도로 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화양다방'이라는 간판은 교회 간판 뒤로 자리했다.
길 건너편 시골 우체국이 애틋했고, '만물상회' 간판은 보기만 해도 배불렀다.
지난달 31일 추석을 앞둔 주일 아침, '고향 교회'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화양읍교회는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길에 위치한다. 읍이라고는 하나 너나 없이 대처로 떠나버려 면소재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십리(4㎞)만 가면 청도읍이어서 상권 형성이 쉽지 않다.
하지만 부모 세대에게 십리 안은 공동체의 개념이어서 인정과 물산이 같이 움직였다. 저녁이 되어도 굴뚝에 연기가 솟지 않는 집이 있으면 이웃이 밥을 나눴다.
화양읍은 구읍(舊邑)이다. 청도를 신읍이라 불렀다. 그래서 화양읍교회 명칭은 한때 구읍교회였다. 지금도 전기세 등 공과금이 구읍교회 명의로 나온다. 화양은 청도의 관아가 있던 성읍이다.
“1900년 초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화양역을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한데 완고한 유림들이 웬 상스러운 양이(洋夷) 것이냐며 반대했습니다. 그 바람에 지금의 청도역으로 확정된 거고요. 근대 교통 하나가 고을을 바꿔 놔 버린 거죠.”
이 교회 임영웅(77) 은퇴장로의 설명이다.
이 완고한 마을에 예수 복음이 들어온 것은 경부선 철도 준공(1904년) 이태 전이다. 그 무렵 대한제국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하와이 이민(1903년)을 추진했다. 그 이민 바람이 화양에도 불었다. 구전에 따르면 당시 지원자들은 미국 문화를 알기 원했고 이에 따라 자발적으로 교회에 다니고자 했다. 이들은 선교사를 만나 “우리가 예수를 믿기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교사들이 청도지역 첫 교회인 풍각면의 풍각제일교회(당시 송서교회·1899년 설립) 조사 김호준을 화양 기도처로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화양읍성 신앙의 뿌리는 1906년 맹의와 선교사 주도로 20여명이 모여 지금의 화양읍교회를 공식 발족했다. 풍전등화의 구한말, 백성은 메시아를 간구했고 그 열망에 따라 교인수도 급격히 늘었다. 1909년 교인이 100여명에 달했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즉 조선의 식민지 전락을 한 해 앞둔 때였다.
그럼에도 조선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사농공상의 신분사회여서 지역 사회 선비들이 야소교를 믿는 것들과 한 동네 살 수 없다며 핍박했다. 때문에 첫 교회터 서상동 합천1리에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5칸짜리 초가집이었다.
이 뒤로도 화양읍교회는 화양읍성 서문 안으로 옮기는 등 몇 차례 떠돌이 신앙생활을 한다. 교회 이름도 서상동교회, 청도서문교회, 청도구읍교회 순으로 변경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교회 역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와 ‘화양읍교회 당회록’에 짧게 거론된 정도가 전부다. 문헌으로 남은 교회 역사가 턱없이 부족하다. 역사 속 교회의 역할을 증명할 만한 문헌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한국의 전통 교회의 대개가 그렇듯 교회 분열과 가난은 자랑스러운 자신의 역사조차 유실하는 원인이 됐다. 이 교회 역시 장로교의 분열, 전쟁 직후의 가난 등의 원인으로 나이테 외에 알 수 있는 자료가 미미했다. 100년사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2008년 부임한 김영달 목사가 사료를 찾아내고 구술을 받는 등 교회 역사 정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날 대예배 후 신현덕(81)·구정숙(75) 은퇴권사를 친교실에서 만났다. 김 목사와, 김 장로도 함께였다. 한 평생을 예수 의지하고 살아온 노(老)권사의 얼굴엔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구읍교회 시찰장을 했다는 신 권사는 청도군 금천면 출신으로 부모를 따라 황해도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예수를 영접했다. 그 뒤 화양에 정착하여 남편 장승록(작고) 전 장로와 함께 3남2녀의 자녀를 키웠다. 큰아들 경수 목사는 경북 성주에서 목회를 한다. 작은 아들 영민씨는 화양읍교회 집사다. 58년째 화양읍교회를 섬기고 있는 신 권사는 “이번 추석에 모든 자녀들이 다 내려와 모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릴 겁니다”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 권사는 어린 시절 어머니 따라 교회를 다녔다. 집도 교회 옆이었다. 그 유명한 청도 반시(납작감)가 집집마다 한 그루씩 있었다고 기억했다. 지금은 교회 옆 화양읍성 객사 도주관(道州館)이 해체·보수되어 번듯하나 50년대만 하더라도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교회가 도주관 지대보다 조금 높아 교회 마당에서 보면 눈 아래다.
“전쟁 전후 빨갱이 잡는다고 살기등등했어요. 어머니 따라 나무 하러 가면 바위 사이에 빨갱이 해골이 즐비했어요. 빨갱이라고 누구 손에 지목 당할지 몰랐죠. 국문을 모르던 어머니는 배운 오빠 잡혀 갈까봐 전전긍긍했어요. 실제 청도경찰서에 불려가 신문도 당했고요. 그때마다 소부뚜막에 양말 걸어 놓고 빌고, 정월 보름에 바위를 보고 빌었어요. 그래도 잡혀가자 세상에서 제일 높은 분이 하나님이라며 교회에 나가신 거죠.”
청도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전선 아래였다. 참화를 비켜간 것이다. 그러나 화양 등엔 피란민이 몰려들어 참상을 실감케 했다. 두 권사는 “인민군 곧 들어온다고 집집마다 땅 파고 귀한 것을 묻고, 피란보따리를 준비해 놓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교회 뒤 화양초등학교는 군인들에게 비워줬어요. 우리는 마을회관 등에서 공부했고요. 읍내 곳곳에 많이 배운 듯한 젊은이들로 넘쳤지요. 그들은 서울 등서 걸어서 왔다고 하더군요. 발이 퉁퉁 붓거나 병든 사람들이었어요. 행색이 거지나 진배없었죠. 그들은(‘국민방위군 사건’ 희생자로 추측된다) 매일 죽어 나갔어요. 시신을 제대로 묻지 않아 땅속에서 다리가 삐죽 나와 무서워 피해 다녔어요.”
교회는 군의 협조를 얻어 피란민 등에게 구호품을 나눠줬다. 장례집전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은 자료가 없으니 몇 세대가 지나면 지워질 것이다.
김 장로는 전쟁이 끝나고 교회가 성경구락부를 열자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이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대구상고 학생이었던 그는 산수 교사였다.
“교회가 예배의 장소이자 배움의 장소였죠. 나이롱과자(뻥튀기) 등을 나눠 먹으며 교제했어요. 주일예배, 주일 밤예배, 수요성가예배를 안 보면 죽은 걸로 알았어요. 요즘은 참 안타까워요. 예배가 기본인데 말이죠.”
원로 장로와 권사의 이구동성이었다.
세월이 흘러 600여명이던 초등학교 학생수는 60명으로 줄었다. 교회 옆 우시장, 닭시장, 개시장 등으로 흥청거렸던 5일장은 폐쇄됐다. 반면 옛터 성돌만 남았던 읍성은 복원됐다. 서문 쪽에 복원된 원형 감옥은 갇히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도주관 위엔 교회가 우뚝하고, 성벽에 오르면 첨탑이 우뚝하다.
그 고향 교회는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붐빌 것이다. 귀성한 이들은 성벽에 올라 1974년 헌당된 고딕건축 양식의 교회당을 보며 스마트폰으로 그 멋진 풍경을 담을 것이다. ‘고향 교회’를 떠나며 신 권사에게 “신앙인의 기본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주일성수하는 겁니다.”
청도=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한국의 성읍교회-청도 화양읍교회] “우리는 예수 믿기를 원한다”… 스스로 간구하다
입력 2014-09-06 03:25 수정 2014-09-06 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