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늙어가는 사회·늙은 육신에 대한 폭로… 국내외 작가 ‘노인소설’ 발간 잇따라

입력 2014-09-04 03:32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 그는 최근 출간된 소설 ‘유령 퇴장’에서 일흔 살 노작가 주커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노년의 삶을 조망한다. 문학동네 제공

‘노인소설 전성시대’다. 요즘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 많이 눈에 띈다. 노인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 가다보니 자연스레 삶과 죽음의 문제가 부상한다. 그동안 노인을 소재로 한 작품이 간간이 나오긴 했지만, 같은 시기에 여러 작가들이 다투듯 화제작을 내놓은 것은 이례적이다.

대표작은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53)의 장편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 올 들어 줄곧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유지하며 독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1905년 스웨덴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살아온 100년의 세월을 코믹하고도 유쾌하게 그렸다. 계속되는 우연과 과장스러운 설정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진다. 가볍게 읽히지만 여운은 묵직하다.

‘유령 퇴장’(문학동네)도 빼놓을 수 없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81)의 신작이다.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인 주커먼. 혈기왕성한 문학청년은 어느덧 병들고 기억력도 흐릿한 일흔한 살 노작가가 됐다. 의지와 상관없이 새어나오는 오줌이 적신 면 패드를 하루에도 수차례 가는 노쇠한 주커먼은 우연히 마흔 살 어린 제이미에게 첫눈에 매혹된다. 관계의 발전이 불가할 것을 알면서도 관심은 커지고 자신과 제이미의 가상 대화를 상상, ‘그와 그녀’라는 희곡까지 쓴다.

199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나딘 고디머는 이 책에 대해 “선택의 여지없이 닥쳐오는 우리 육신의 무자비한 노쇠에 대한 기품 있는 폭로”라고 평했다.

황순원문학상 본심에 오른 은희경(55)의 단편 ‘금성녀’의 주인공은 일흔 셋 할머니 마리다. 금성녀는 그의 어린시절 별명이었다. 어려서 왕따를 당하던 마리의 삶은 커서도 순탄치 않다. 그는 하필 초등학교 시절 옆 반 담임이었던 유부남과 첫 사랑에 빠진다. 이후 도피처로 선택한 결혼생활, 그리고 남편과 친언니의 죽음이 이어진다.

작가는 “노년은 소재일 뿐 정형화된 틀로 재단할 수 없는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이야기, 거의 5대에 걸친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김훈(66)은 문학동네 여름호에 발표한 단편 ‘저만치 혼자서’에서 도라지수녀원 늙은 수녀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거두는 수녀들의 일상을 통해 자연스레 죽음의 의미를 묻는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 황정은(38)의 단편 ‘아무도 아닌, 명실’은 치매 노인이 주인공이다. 치매에 걸린 노인 ‘명실’이 수만 권의 책을 남기고 죽은 친구 ‘실리’의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명실’의 글쓰기는 한 줄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서영채(53) 문학평론가는 “작가들도 늙어가고 우리 사회 노인도 늘어가고 있다. 이미 서울 종묘 앞에는 노인타운이 형성됐고 천안과 의정부를 오가는 지하철은 노인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도 내고 있다”면서 “이런 현상을 소설가들이 놓칠 리 없으니 앞으로도 노인소설은 계속 나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