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성경은 말한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눔과 상생의 삶을 사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흉년 때 곳간 문을 활짝 열고 이웃을 구제하거나 나라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자금을 제공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실천한 명문가가 적지 않다. 마음마저 넉넉해지는 한가위를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아온 강릉 선교장과 경주 최부잣집으로 배움의 여행을 떠나본다.
◇강릉 선교장=경포호수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집 앞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집으로도 불리는 선교장(船橋莊)은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8∼1781)이 300년 전에 터를 잡았다. 조선시대에 궁궐이 아닌 민가로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의 규모는 99칸이었지만 선교장은 102칸이었다.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행랑채, 사당, 활래정에 하인의 집까지 더하면 300칸에 이를 정도로 웅장한 규모였지만 지금은 123칸만 전해온다.
강릉 안인진리의 해변에서 염전을 일구고 소금을 팔아 부를 축적한 이내번은 영동 일대에 대농장을 개간해 농민들에게 제공했다. 남쪽으로는 삼척과 동해, 북쪽으로는 속초와 양양, 서쪽으로는 횡성과 평창까지 선교장의 농토로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영동 일대에 다섯 군데나 있었다고 하니 조선 최고의 만석지기 부자였던 셈이다. 여느 고택과 달리 집 이름에 ‘당(堂)’이나 ‘각(閣)’ 대신 ‘장(莊)’을 붙인 것도 독립영지를 가진 유럽의 귀족처럼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을 갖춘 장원(莊園)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교장의 주인들은 단순히 부를 축적만 한 것이 아니라 나눔과 상생의 삶을 추구해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갑오농민전쟁 때 선교장을 공격한 농민군을 물리친 세력이 선교장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형성한 소농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교장을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에 비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교장의 넉넉한 인심은 자연스럽게 전국의 시인묵객들을 불러모아 풍류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인근에 경포대와 경포호가 있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해 시인묵객들은 선교장에 머물며 주인으로부터 온갖 편의를 제공받았다. 손님들이 떠날 때 옷을 한 벌씩 지어 주기 위해 바느질을 하는 침방을 따로 운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선교장을 찾았고, 여운형은 선교장에 위치한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몇 년 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의 다회를 선교장에서 연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경주 최부잣집=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최부잣집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월성 옆에 위치한 최부잣집은 300년 동안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배출한 명문 부자 가문이다. 최부잣집은 1700년쯤에 건립된 경주 최씨 종택으로 본래 99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1884∼1970) 선생이 돌아가던 해에 사랑채와 별당이 화재로 소실돼 70여칸으로 줄어들었다.
경주 최부자는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존경받는 부자가 되었을까.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온 육훈(六訓)이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격조와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12대 만석지기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최진립이다. 후손들은 최초로 관개시설을 만들어 이앙법을 도입하고 원성의 대상인 마름을 없앴다. 또 만석 이상이 수확되면 나머지를 되돌려주는 나눔의 경영철학을 실천해 소작농들이 스스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정착시켰다.
최부잣집에서 눈길을 끄는 건물은 안채 앞 드넓은 공간에 위치한 목재 곳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곳간은 쌀 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최부자는 흉년 때 이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줌으로써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 자칫 부자로서 사기 쉬운 원성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선생에 의해 완성됐다. 일제 강점기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군자금을 보냈다. 최준 선생은 광복 후에는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과 계림학숙을 설립했다.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지 않고 움켜쥐고 있었다면 과연 그 재산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을까.
강릉·경주=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넉넉한 情’ 이젠 빈 곳간서 만난다… 추석연휴에 가볼만한 명문가
입력 2014-09-04 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