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7)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입력 2014-09-05 03:00
이스라엘에서 현재도 지켜지고 있는 ‘하누카(修殿節)’ 행사. 하누카는 제2차 예루살렘 성전이 야훼에게 재봉헌된(BC 165)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 이때 의식용 촛불을 밝히고 선물도 교환하며, 어린이들은 명절놀이를 한다.
감람산 동쪽의 베다니(벳바게) 지역. 베다니란 '무화과의 집'이란 뜻이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지역의 요단강 서편, 현재의 알에이자리아 지역이다.
나사로의 무덤. 좁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옆에 부착된 손잡이를 잡고 27개의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한다. 무덤 바로 옆에 회교사원과 첨탑이 있다.
BC 170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는 제우스 신을 중심으로 세계 종교를 통일하려는 야망으로 애굽 정벌에 나섰다가 애굽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의 방해 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BC 168년 다시 애굽으로 출정했으나 이번에는 로마의 견제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귀환 길에 예루살렘을 그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안티오쿠스 왕은 성전에 가증스러운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마카비상 1:54)

그 성전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이 AD 516년 작은 규모로 재건한 제2성전이고, 안티오쿠스가 세운 것은 제우스의 신상이었다. 안티오쿠스는 그 제단에서 유대인이 금기시하는 돼지를 잡아 바쳤고, 남자 아이들의 할례를 금지했다.

“할례를 행한 제사장들과 부모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고, 아이의 시체를 그 부모의 목에 매달았으며, 율법서는 모두 불살랐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12-5-4)

하스몬가의 제사장 맛다디아가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경건파 ‘하시딤’과 합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BC 165년 성전산을 장악한 그들은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개수하여 중단되었던 제사를 회복하고 그날을 ‘하누카’, 즉 수전절(修殿節)로 기념하게 되었다. 그리고 AD 29년 수전절에 예수께서는 헤롯이 중건한 제3성전에 서신 것이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 10:22∼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이라며 돌을 들어 치려하자 그분이 말씀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요 10:36)

예수와 제자들은 달려드는 유대인들을 피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요 10:40)

성경에는 같은 지명을 가진 다른 지역이 있어 혼동할 수가 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이 지역을 KJV(King James Version)는 ‘베다바라’로 번역했으나 실은 그곳도 ‘베다니’였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요 1:28)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일시나마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므로(요 1:35) 그곳의 지명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감람산 동쪽의 ‘베다니’ 마을에 있는 마르다의 집에 머물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 건너편의 ‘베다니’ 지역으로 피신을 하셨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눅 13:32)

이 지역에서 가르치신 예수의 말씀마다 마지막 속건제를 준비하는 그분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그 속건제의 날을 ‘잔치’에 비유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잔치를 배설하려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눅 14:13∼14, 한글개역판)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그는 또 잃어버렸다가 찾은 한 마리의 양(눅 15:4), 잃었다가 찾은 한 드라크마(눅 15:9), 돌아온 둘째 아들(눅 15:32)의 비유로 ‘아버지의 마음’을 전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그때 감람산 쪽의 베다니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누이들이 예수께 급히 연락을 보낸 것은 그분이 속히 오셔서 병을 고쳐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나사로를 위해 베다니로 다시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자 그분이 말씀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 11:4)

제자들을 설득할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언급하는 그분의 말씀에도 제자들은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 그것은 나사로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 11:5)

그분을 비롯한 열두 제자, 어쩌면 70명의 제자까지 마르다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마르다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사랑’보다 ‘권세’ 또는 ‘자리’에 더 마음을 쓰고 있던 ‘갈릴리’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왕이 되실 때에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로 서로 생각이 예민해져 있었다.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 9:34)

게다가 예수의 열두 제자는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인데 나사로는 ‘유대 사람’이었다. 열두 제자는 나사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이때쯤일 수도 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눅 16:25)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고도 이틀을 더 기다리시다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셨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는 그래도 가겠다고 하신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잠들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히려 비꼬아 말한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그때 도마가 나서며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그러나 요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혼자 베다니에 가셨던 것으로 보인다. 베다니에 가셨을 때 그곳에 유대인들과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을 뿐,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마르다의 입을 통해 다시 아들을 위로하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의 말을 들으신 것에 감사하며 돌로 막아 놓은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