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34일째이던 지난 5월 1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사과하면서 “국민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반드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정부조직 개편, 공직사회 개혁 등 굵직굵직한 대책을 내놨다. 대통령의 표정이 워낙 비장했기에 국민들이 이번에는 어떻게든 나라가 좀 바뀔 것이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긴 여름을 지나 가을 문턱에 선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인가. 무엇이 바뀌었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어떤 변화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법 협상은 여야와 유가족의 격한 대립으로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고 진상조사는 시동조차 걸지 못했다. 정부조직 개편안은 국회에서 수개월째 잠자고 있고, 공직사회 개혁은 아예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일찌감치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더 큰 걱정은 국론분열 조짐이다. 지금 이 시각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농성 중인 광화문광장과 청와대 앞 청운동 주민센터 주변은 살벌하기 짝이 없다. 특별법 제정을 놓고 이른바 보수와 진보 측 사람들이 감정싸움을 하기 일쑤다. 인터넷 사이트나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말싸움이 워낙 심해 섬뜩할 정도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에게 쌍욕을 하기 예사고, 유가족을 폄하하는 글이 난무한다. 정치권 종교계 학계 언론계 등 갈라지지 않는 곳이 없다. 사고 직후 안타까움과 부끄러움, 슬픔, 분노의 마음을 함께 가졌던 국민이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상당수 국민이 협상 중인 특별법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 채 막무가내로 상대편을 비방하는 데 있다. 수사권을 어떤 형식으로 부여하는 게 바람직한지 최소한의 법률 지식도 없이 맹목적으로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있다. 이념과 계층, 지역, 세대 등 우리 사회의 주요 갈등 요소들이 한데 뒤엉켜 있다. 국론분열이 심화될 경우 국가혁신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비극을 막는 유일한 길은 특별법을 하루라도 빨리 제정해 진상조사를 서두르고, 후속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각종 개혁과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당연히 정치권이 앞장서야 한다. 특별법 협상과 관련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다시 머리를 맞대는 수밖에 없다. 야당은 유가족들에게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당당하게 입법권을 행사하고, 여당은 여야 원내대표의 두 번째 합의안을 토대로 제3의 양보안을 마련해야겠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도 뒷짐만 지고 있을 게 아니라 해결책 마련에 힘을 보태야 한다.
이 시점에서 더 없이 중요한 것은 유가족 입장이다. 어쩌면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 많은 국민들은 유가족들이 한 발 뒤로 물러서주길 바라고 있다. ‘세월호 피로감’을 호소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특별법 제정은 이제 정치권에 맡겨야 한다. 진상조사가 엄정하게 이뤄지도록 해 달라는 유가족들의 입장은 충분히 표명됐다. 더 이상 입법에 발목을 잡는 것은 요구가 너무 과하다는 비판 여론만 확산시킬 뿐 별 실익이 없다고 본다.
특별법이 제정되고 나면 곧바로 보상 문제가 이슈로 등장할 것이다. 지금 분위기라면 또 한번의 소용돌이가 불가피해 보인다. 유병언 가족에 대한 범죄수익 환수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예산으로 보상이 이뤄질 경우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보수단체들이 벌써부터 국가유공자와의 형평성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관한한 유가족들에 대한 여론이 매우 중요하다. 만에 하나 여론이 돌아설 경우 유가족들은 졸지에 외톨이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
[성기철 칼럼] 유가족들 외톨이 될라
입력 2014-09-03 0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