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를 앞두고 있다. 통계청 기준에 따르면 이 세대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출생한 세대를 뜻한다. 이들은 58년 개띠로 대표되는 50대의 연령층을 구성하고 있다. 그 수가 대략 720여만명이다. 현재 우리 사회 각 분야를 주도하고 있지만 잊혀진 세대와 같았다. 세대로서 주목을 받거나 인정을 받은 일이 없다.
이 세대는 사실 행운의 세대이다. 농업문명의 끝자락에서 태어나서 산업문명의 여명을 보았고, 지금은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다. 한 세대에 3가지 문명을 겪은 독특한 세대이다. 이들은 전쟁의 피해를 직접 겪지는 않았다. 한국전쟁의 참화는 비켜갔고, 월남전에 참전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88올림픽으로 상징되는 경제성장의 결실도 맛보았다. 이들 자신이 민주화 시대를 연 주역이기도 하다. 2002년 월드컵으로 대표되는 세계화의 수혜자이다.
필자도 베이비붐 세대의 한 사람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서울 봉천동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집은 개나리 울타리에 둘러싸인 초가였다. 울타리 밑에 마가 지천으로 뻗어 있고, 집 그늘에는 돌나물을 수북하게 심었다. 잇몸이 부으면 실개울 돌미나리를 소금과 함께 찧어서 물었다. 집 앞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와 앵두나무를 심었다. 학교를 가려면 보리밭 사이 언덕을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떼를 지어서 다녔다. 밤에는 뒷산 여우굴이 무서워서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지금의 서울대 자리는 이따금 나무꾼이나 다닐까 놀러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다.
봄이 되면 아지랑이가 아련했다. 여름에는 대청마루에 누워서 햇볕을 피했고, 가을이면 대추나무 밑 너럭바위 위에서 낮잠을 잤다. 햇볕에 달구어진 바위는 알맞게 따뜻했다. 겨울밤이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지붕을 뒤졌다. 참새를 찾아서 처마 밑에 손을 넣었다. 벼가 누런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에 꿰었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봉천로가 됐지만 꽤 넓은 개울이 마을을 두르고 있었다. 겨울이면 썰매를 타고, 여름이면 멱을 감았다.
마을 형들은 대보름이 되면 개울을 사이에 두고 투석전을 벌였다. 산 위에서 깡통에 불을 담아서 돌리고, 작은 짚단을 나이만큼 묶어서 횃불을 만들었다. 해가 바뀌자 하루에 두어 차례 승합차가 마을에 들어왔다. 청계천에 홍수가 나자 피난민들이 와서 신림천 뚝방에 정착했다. 지금의 신림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불과 두어 해 남짓 살고 이사를 나왔지만, 화다리라 불리던 그 마을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화다리는 상도공원 서쪽 당곡중고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필자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베이비붐 세대는 농촌이나 자그마한 중소도시에서 자랐을 것이다. 고향 마을을 마음에 품고 사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한국교회에서도 기둥과 같은 세대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1960년대 민족복음화 운동의 세례를 받았다. 70·80년대에 도시화와 함께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들은 질풍노도와 같은 민주화 운동의 물살도 타보았다. 선교 100주년과 초대형교회의 탄생으로 긍지도 가졌고,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도 지니고 자라났다. 세대 간의 갈등도 겪었지만, 정서적인 면에서 이 세대는 아래 세대보다는 위 세대와 공유하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이들이 한 세대에 3가지 문명을 모두 겪은 것처럼, 이 세대는 한국교회의 영욕을 모두 겪고 있다. 이 세대가 짊어지고 갈 짐이 무겁다. 누구나 한국교회의 화두가 ‘개혁’이라는 것을 공감하는 것은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베이비붐 세대가 하늘나라를 참된 마음의 고향으로 품고 개혁의 짐을 지혜롭게 담당했으면 한다.
변창배 목사 (예장 통합 총회기획국장)
[시온의 소리-변창배] 마음의 고향
입력 2014-09-03 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