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곽효정] 말똥과 양의 엉덩이

입력 2014-09-03 03:10

몽골 여행은 스무 명의 다양한 동행자와 함께했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분들이었는데 나는 그중 한 할아버지와 그분의 손자인 재영이와 자주 어울렸다. 재영이는 아홉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어른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대화하는 데 탁월했다.

3일째 되던 날 우리는 초원에 도착했다. 몽골족의 이동식 집 게르에 짐을 풀었다. 화로에서 불꽃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 나와 재영은 일행 중 천문대장님의 망원경을 빌려서 한참 동안 별자리 공부를 했다. 초원과 하늘이 맞닿아 있어 마치 별이 풀끝에 닿을 것처럼 보였다. “그냥 눈으로 보는 게 더 잘 보여요.” 재영이의 말이 맞았다. 망원경으로 당겨온 별보다 두 눈으로 정직하게 바라본 별이 더욱 빛나 보였다. 우리는 마치 양치기라도 된 양 지팡이를 짚고 아무데나 주저앉아 별을 바라보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재영은 또래만큼 좋은 말벗이었다. 그게 하도 신기해서 재영이 할아버지에게 특별한 교육방식이 있느냐고 여쭤봤다. 그는 다만 다른 점은 재영을 재울 때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초원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한 재영을 데리고 오후 내내 걷다가 한 여행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초원과 하늘뿐이었다. 그때 재영이 말했다. “온 세상이 화장실이잖아요.” 우리는 게르로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이 떠올라서 깔깔 웃으며 말장난을 했다. 온 세상이 집, 온 세상이 초원, 온 세상이 하늘뿐이라고.

다음 날 재영은 내게 카메라와 녹음기를 빌려갔다. 나는 여행을 다닐 때면 풍경을 담을 뿐 아니라 그곳 소리까지 녹음하곤 했는데 재영은 그게 재미있어 보였나 보다. 무얼 담으려고 하냐고 물었지만 재영은 개구진 웃음만 지었다.

나는 몽골에서 돌아와 재영이 찍었을 법한 사진을 찾아봤다. 조금 낮은 시선으로 담아낸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아이가 간직하고 싶은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한껏 기대하며 사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재영이 담은 풍경은 내가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말똥’과 ‘양의 엉덩이’였다. 이번엔 녹음기를 돌려보았다. 처음에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녹음을 잘못했나 싶었는데 잠시 후 어떤 소리가 들렸다. 타닥타닥. 그것은 게르의 화로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였다. 한참동안 그런 소리가 이어지다가 잠시 후 재영의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옛날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곽효정(매거진 '오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