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이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린 지 오래다. 교회를 울긋불긋하게 꾸미는 것에 관심이 있지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나중이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다. 하지만 교회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1920년대에도 높았다. 독립운동가이자 감리교 목회자인 이용도(1901∼1933) 목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시 살아났다.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기에 낮은 자들과 예수처럼 살았던 이 목사의 삶을 젊은 신학도인 저자가 추적했다. 이 목사는 당시 주님의 일꾼들이 직업화되는 것을 여지없이 공격하고 ‘조선기독교의 재출발’을 역설했다.
송도고(송도고보)를 거쳐 협성신학교(현 감신대)를 졸업한 이 목사는 기도와 사랑으로 한국교회를 깨운 선각자였다. 그는 항일 독립운동으로 네 차례 체포돼 3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1933년은 치욕의 해이자 영광의 해였다. 폐병 3기의 몸으로 주어진 시간 안에서 피를 토하던 이용도는 그해 2월 황해도 해주 부흥회 중에 일제에 멱살이 잡히고 얻어맞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고 감리교단은 이용도의 목사직을 정지시키고, 장로교단은 이용도를 버리지 않겠다는 성도들을 교회에서 추방했다. 이 목사는 결국 폐병이 악화돼 33년 10월 2일 33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 목사와 의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이호빈 목사가 ‘예수교회’를 이끌어갔다.
이 목사는 95년 독립유공자가 됐고 99년 감리교 목사직이 복권됐다. 이 목사의 업적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감신대 안에 서 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한국교회 깨울 선각자 다시 보기
입력 2014-09-03 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