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서완석] 통일의 지혜 독일서 찾자면

입력 2014-09-02 03:24

인천아시안게임 교류 기회로

스포츠를 외교에 활용한 전형적인 사례로 미국의 핑퐁외교를 들곤 한다. 1971년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미국 대표팀이 귀국길에 죽의 장막이라 일컫던 중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가졌다. 한국전쟁 후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양국은 탁구 경기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열었고, 훗날 외교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에도 스포츠 외교가 존재했었다. 인조 14년인 1636년 파견된 조선통신사 사절단에는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에 따라 마상무예에 능한 재인(才人)들이 포함됐다. 일본은 조선과 달리 말 위에 서기도 하고 말의 좌우를 옮겨 다니는 마상재(馬上才)의 역사가 없었다. 마상재에 매료된 일본인들을 위해 이후 사절단에 마상재에 능한 인물이 반드시 동행하게 됐다고 한다. 그 마상재를 지금의 문화 범주에서 보면 마장마술, 장애물비월 경기보다 난도가 몇 갑절 높은 승마의 한 종목이 될 터이다.

스포츠는 이처럼 외교적 도구나 국위 선양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또 적대국 간 상호교류와 신뢰를 증진시키는 가교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일 통일의 과정을 연구한 학자들 눈에는 통일에 끼친 스포츠의 역할은 아주 미미했던 것으로 비친 모양이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0년대 초 서울에서 열렸던 서울올림픽 기념 국제학술세미나에 주제발표자로 나선 한 독일 학자는 “동서독 양국민의 수십년에 걸친 활발한 교류의 결과 통일이 왔다”면서도 “스포츠 교류가 통일을 촉진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주장을 내놨다. 스포츠는 교류의 작은 수단일 뿐 통일을 결정지은 것은 그보다 더 상위개념, 즉 국내외 정치·경제 역학관계에 따라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서울올림픽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그 당시 서울올림픽이 국제사회의 냉전 종식에 크게 일조했다고 믿어온 기자에게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사실 독일의 갑작스런 통일은 동서독 간에 이뤄진 수많은 인적 교류의 결과였다.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유입된 인구는 490만명에 달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는 47만명이 넘어갔다. 따라서 통독은 서독의 적극적인 통일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동독과의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의 결과 우연한 모습으로 찾아왔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서독정부는 동독에 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때는 반드시 인적교류 확대를 조건으로 내걸고 이를 관철시켰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 및 개발 대가로 9억4000여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한 한국이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화해조치를 얻어내지 못한 것과 비교된다.

미녀응원단 방한 재협상해야

독일 학자의 주장처럼 스포츠가 통일을 직접적으로 앞당기진 못했더라도 통일의 밑거름이 된 교류 확대를 촉진시킨 것만은 틀림없다. 탁구가 죽의 장막을 열어 제친 것처럼 스포츠만큼 한순간에 적대국가 국민을 단번에 무장해제시키는 효과를 주는 분야도 없다. 그런 점에서 오는 19일 개막되는 인천아시안게임은 그동안 대결국면으로 치닫던 남북관계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북측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선수단 파견에 적극적이었고 미녀응원단 파견도 제의해 왔다.

하지만 잔뜩 기대했던 북한 미녀응원단의 방한은 체제경비 지원문제 등의 이견으로 일단 브레이크가 걸린 모양이다. 경제적 지원을 할 때 반드시 인적교류 확대를 내걸었던 서독의 경험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미녀응원단 파견 그 자체가 인적교류 확대인 만큼 우리 정부가 좀 더 유연한 자세를 가졌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직 개막일까지 협상의 시간은 있다.

서완석 체육부 국장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