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박성래] 한·중·일 근대화와 서양선교사의 역할

입력 2014-09-02 03:52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은 많은 화제를 남겼다. 돌이켜 보면 한·중·일 3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톨릭 내지 기독교는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15세기 이후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힘을 비축한 서양은 대포로 무장한 군함에 가톨릭 선교사와 상인을 태우고 지구를 주름잡기 시작했다. 대포와 군함의 위력에 수많은 나라들이 서양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나름의 고도 문명권이던 동북아 3국은 그리 간단하게 서양 땅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한·중·일 세 나라에 미친 서양의 힘도 서로 달랐고, 당연히 그 반응도 서로 달랐다. 보름 전 한국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소속인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특히 활발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유럽을 휩쓸 때 그들은 가톨릭 개혁을 외치며 등장한 수도회였다.

그들은 특히 해외 선교와 교육에 열성이었고, 일본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자비에르와 베이징에 자리잡은 마테오 리치 등 동아시아 초기의 대표적 선교사들이 바로 예수회 소속이었다. 16세기 전반에 이미 그들은 중국과 일본에 나타났다. 하지만 북쪽으로 치우친 지리적 특성 때문에 그들은 조선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더 많은 선교사들이 리치 이전에 활동했지만 중앙집권의 나라 중국에서는 1601년 리치가 베이징에 자리잡고 기독교와 과학에 대한 책들을 한문으로 번역해내기까지 그 영향은 미미했다. 그러나 지방분권의 나라 일본에서는 선교사 수는 적었으나 영향은 훨씬 강했다.

봉건영주들이 다투어 새것을 배워 힘을 기르려 경쟁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서양 접촉은 처음 그들이 도착한 서쪽 규슈(九州) 지역만이 아니라 센다이(仙台) 등의 동북지방에서까지 활발했다.

바로 그 동북지방 센다이에서는 지금 ‘경장견구사절’(慶長遣歐使節 1613∼20년) 400주년 행사가 열리고 있다. 1613년 센다이를 떠난 일본 사절단은 2년 뒤 1615년 11월에는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5세를 만났다. 꼭 30년 전에 이미 일본 서쪽 영주들이 ‘천정견구소년사절’(天正遣歐少年使節 1582∼90년)을 파견해 1585년 교황 그레고리 13세를 만난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여러 해 동안 위험한 바다를 넘어 일본 사절단을 보냈고 교황과 만났지만 그 자체로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비슷한 노력을 한 일이 없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중국 땅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중국 지식층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당연히 그들을 탄압하는 적극적인 노력도 없었다. 그러나 더 적은 선교사들만 들어왔지만 일본에는 극성으로 이를 환영하는 측이 있는가 하면 극렬히 반대하는 측도 있었다. 가톨릭이 일본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것은 이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 들어와 서양의 과학과 종교를 전한 선교사들이 조선에는 300년이나 늦게 나타난 셈이다. 그들의 ‘지구상의 발견’ 항로에서 조선은 북쪽에 치우쳐 있어서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836년 처음 프랑스 신부 몇 명이 입국했으나 그들은 3년 뒤 희생당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세계 정세의 변화에 따라 동아시아에는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 선교사들도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서양의 종교와 과학을 전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심한 탄압을 거두고 그들로부터 적극적으로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이 미지근한 중국 사람들보다 훨씬 근대화에 앞장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서양과의 접촉이 훨씬 늦었던 조선의 지식층은 그 자극을 느끼지도 못한 채 과학기술을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동아시아 세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가톨릭은 절대적 영향을 미친 셈이다. 중국, 일본, 조선의 서로 다른 서양에 대한 반응이 최근 몇 백년의 동아시아 역사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박성래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