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문단열 (7) 비유학·비전공·비학위 ‘3非 강사’가 스타로

입력 2014-09-02 03:34
문단열 전도사는 2002년 EBS 교육 프로그램 ‘잉글리시 카페’를 통해 ‘스타 강사’로 거듭났다. 사진은 2004년 한 특강 무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문 전도사의 모습.

1990년대 중반부터 나는 EBS로부터 자주 출연 요청을 받았다. 실제로 오디션을 본 적도 여러 차례 있다. 오디션을 보고 나면 PD들은 항상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출연은 번번이 무산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EBS ‘윗분들’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알려졌다시피 나는 유학을 다녀오지도,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지도 않았다. 영문학 석사나 박사학위도 없다. ‘비유학’ ‘비전공’ ‘비학위’라는 ‘조건’을 갖춘 ‘3비(非) 강사’다. 어쩌면 내가 방송 입문에 실패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가방끈’이 짧다는 이유로 실력까지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러다 케이블 교육채널인 재능방송의 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에 단역으로 잠깐씩 출연해 조금씩 유명해지자 EBS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출연해달라고 부탁해서 갔다가 결국 출연이 무산된 게 3차례나 있었습니다. 이젠 EBS에 출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끈질겼다. 계속 전화가 왔다. 속는 셈 치고 첫 방송분 녹화에 임했다. 프로그램명은 ‘잉글리시 카페’였다. 그리고 2002년 8월 26일 진짜로 첫 회가 방영됐다.

기존 영어 교육 프로그램은 정해진 틀이 있었다. 사회자가 특정 문구를 소개하고 원어민 강사가 이 문구를 발음해주는 형태였다. 하지만 ‘잉글리시 카페’는 달랐다. 예능 프로그램들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나와 수다를 떨며 영어의 재미를 전했다. 라이브 음악 밴드가 함께한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출연자들이 연기를 하며 특정 상황에 들어맞는 영어 문구를 가르쳐주는 것도 특이했다.

‘잉글리시 카페’로 나는 금방 유명해졌다. 시청률은 2∼3%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다. EBS 프로그램으로는 상당히 높은 시청률이었다. 소위 말하는 ‘대박’이 터진 것이다. 팬 카페가 개설됐고 특강을 요청하는 각계의 요청도 이어졌다. 길거리에 나가면 상당수 사람들이 나를 알아봤다.

하지만 즐겁진 않았다. 사업 실패 후 죽음을 생각하다 고(故)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뒤부터 희망을 품게 됐지만 내겐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부채가 있었다. 인터넷 영어 교육 업체인 ‘펀글리시’가 성공했지만 갚아야 할 대출금은 늘어만 갔다. 수입이 생기면 빚을 갚기보단 회사를 키우는 투자금으로 썼기 때문이다. 펀글리시를 시작할 당시 5억원이던 빚은 16억원까지 늘었다.

유명세를 치르면서 빚을 갚으라는 채권자들의 독촉은 더 심해졌다. 전화의 내용은 이랬다. “너 TV에도 나오더라? 유명해졌으니 돈도 많이 벌었겠네. 빨리 빚이나 갚아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거리에서 팬들이 반갑게 인사해도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EBS가 아닌 KBS MBC SBS 등 시청률이 잘 나오는 지상파 방송 3사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나면 채권자들의 독촉 ‘수준’은 한층 더 심해졌다. “TV에 많이 나오지만 출연료는 미미하다”고 항변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채권자들은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유명세를 얻었지만 나는 여전히 돈의 노예였다.

설상가상으로 잘 나가던 펀글리시 역시 2000년대 중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우후죽순 생겨난 영어회화 관련 인터넷 강의 업체는 수백개였다. 하지만 영어회화는 대면(對面) 교육이 효율적인 분야다. 얼굴을 마주하고 문장과 문장을 주고받아야 실력이 는다.

즉 영어회화와 인터넷 강의는 애초부터 ‘궁합’이 맞을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엔 호기심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인터넷으로 영어회화 강의를 수강했지만 별 효과가 없다는 게 입증되면서 수요는 급감했다. 하지만 나는 미련하게도 ‘한 방’을 꿈꾸며 이 사업에 계속 투자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