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특한 추상회화 양식 ‘모노크롬’ 진면목 보여준다

입력 2014-09-02 03:33
하종현 화백의 ‘접합’. 캔버스 뒷면에서 물감을 앞으로 밀어 넣는 기법으로 그렸다.
이우환 화백의 ‘점으로부터’. 붓질의 시작인 점을 반복해 찍음으로써 회화의 본질을 얘기한다. 국제갤러리 제공
박서보(83) 하종현(79) 이우환(78).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세 거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단색화의 예술’ 전 기자간담회에서다. 1970년대 젊은 시절, 함께 활동한 이후 국내외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온 세 작가는 작품을 나란히 내놓은 적은 많지만 기획전에 동시에 참석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세 작가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 키워드는 ‘모노크롬(단색화)’이다. 모노크롬이란 단색만 사용하는 미술양식으로 1970∼80년대 한국 화단을 풍미한 독특한 추상회화 양식이다. 서구에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있고, 일본에 모노하(物派)가 있다면 한국에는 단색화가 있다. 먹으로 그린 전통 수묵화에 뿌리를 둔 한국 단색조 그림을 영어식으로 모노크롬(monochrome)이라 일컫는다.

한국의 단색화는 70년대 ‘국전’으로 대표되는 아카데믹한 미술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됐다. 서구의 모더니즘에 한국의 정신성을 접목시켜 국제적인 지평으로 나아가려는 시도였다. 서양 추상회화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면, 한국 단색화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했다. 그냥 단색만 쓰는 게 아니라 흰색, 검은색, 갈색 등을 섞은 다층적 단색이었다.

단색화는 70년대 태동한 이후 80년대 민중미술,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거셌던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40년간 한국미술사에서 독창적 사조로 자리 잡은 것이다. 10월 19일까지 열리는 국제갤러리 전시는 김기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 대표적인 작가 7명의 작품을 통해 한국 단색화 운동의 생생한 면모를 보여준다.

전시는 최근 세계 경매시장과 국제아트페어에서 이우환 정상화 하종현 등의 단색화가 높은 가격에 팔리고 이에 대한 국내외 관심이 높아지자 본격적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한국 단색화의 부상은 서구에서 추상회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브랜드인데도 아직 가격이 저평가됐다는 인식 때문이다.

전시 참여 작가 7명의 공통점은 ‘단색화’ 외에도 ‘반복수행’을 들 수 있다. 이우환의 선과 점의 행렬, 박서보의 선과 점의 묘사, 정상화의 물감 뜯어내기와 메우기, 윤형근의 색의 중첩, 정창섭의 한지의 겹침, 하종현의 캔버스 뒤에서 물감 밀어내기, 김기린의 물감의 분무(噴霧) 등 반복적 행위가 작가들의 작품 속에 고르게 녹아 있다.

작가들은 서구사회를 모델로 성장 제일주의를 구가했던 당시 사회상과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단색화를 통해 나름의 발언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하종현의 캔버스 뒤에서 물감 밀어내기 기법인 배압(背壓)은 군사정부 시절, 감춰야만 했던 내면의 울분을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한국의 미를 서양화로 변용시킨 그의 작품은 추상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다.

전시는 스위스 바젤아트페어 등에서 한국 단색화를 줄곧 소개한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의 의지로 이뤄졌다. 초빙큐레이터를 맡은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호남대 교수는 “동시대 해외 미술의 현장 속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한국 단색화의 가치와 의미를 세계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갤러리 1·2·3 전관에서 100여점 전시(02-735-8449).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