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傾聽 부실이 ‘갈등공화국’ 낳아

입력 2014-09-01 03:14

한참 전 사오정 시리즈란 우스개가 있었다. 시종 동문서답으로 이어지는 게 특징인데 우리 사회의 소통 부재를 매우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사오정 부인이 퇴근해 온 사오정에게 “퇴근길 힘들지 않았어요?”라고 말을 건네면 사오정은 “아니, 태극기 흔들지 않았는데”라고 답하는 식이다. 대화는 겉돌고 서로는 다른 세계 속에 산다. 사오정이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기보다 들을 마음의 자세가 안 된 게 탈이다.

웃자고 하는 말을 정색하고 해석하는 것 같지만 이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수준이다. 기업컨설팅 강사 최장일 목사는 ‘사랑하는 당신, 마음은 안녕하십니까’(2001)라는 책에서 말하는 속도보다 생각하는 속도가 약 4배 정도 빨라서 경청(傾聽)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상대방의 얘기를 듣다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상대의 얘기를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요즘 ‘갈등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혼란스러운데 그 본질은 바로 경청 부실에 있다. 귀는 열려 있으되 말귀를 못 알아듣고 대화는 하는 듯해도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는 못한다. 서로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 대화는 지지부진이고 공감·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경청 부실, 공감·소통 부재 속에서 상대에 대한 믿음이 생길 리 만무하다.

세월호특별법안을 둘러싸고 유가족을 비롯해 여야가 대립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경청 부실→공감·소통 부재→신뢰 상실→대립·갈등 증폭’의 틀에서 한 치도 비켜나 있지 않다. 유가족들은 시종 진상규명을 요구해 왔지만 정치권은 그 요구를 어느 수위로 수용할 것인지에 몰두한 나머지 유가족의 속내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진상규명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 부여 여부가 쟁점인 듯 보이지만 유가족들의 관심은 여전히 진상규명이다. 수사권·기소권이 있어야만 진상규명이 되고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주장의 이면엔 제도권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뿌리내려 있다. 나아가 수사권·기소권이 부여된다 한들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도 있을 터다. 특별법을 둘러싸고 대립만 앞세워온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가시지 않는 한 수사권·기소권 여부는 한갓 논란거리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만사 제치고 진상규명을 갈망하는 유족들의 마음의 소리를 정치권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망가진 신뢰를 회복하자면 유가족과 정치권이 한 자리에 앉아 경청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정부도 귀 기울여야 함은 다를 바 없다. 지난 5월 19일 대국민 담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최종 책임은 저에게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특별법은 국회가 풀어야 할 문제라면서 제삼자인 척 뒷짐만 지고 있다. 이는 결코 유족들을 경청하는 모습이 아니다.

경청 부실의 문제는 국가 차원에서만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에서든 가정에서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 제기된다. 지난주 20년 가까이 함께 일했던후배 기자가 갑작스레 가정과 직장을 등진 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홀로 떠나고 말았다. 그가 겪었을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알지도 못한 채 비보를 접해야 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이다. 그간 혹 그가 미세하나마 드러냈을지도 모를 마음의 소리를 우리는 경청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친밀함으로 가장한 채 하루하루를 그저 스치듯 지내왔던 것 같은 우리의 미욱함만이 아픔으로 남았다. 상대의 마음에서 요구하는 소리를 서로가 듣지 못할 때 죽음은 도둑처럼 엄습하는 모양이다.

국가는 물론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경청 부실은 갈등과 대립은 물론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주장하는 마음의 소리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경청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갈등공화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경청이야말로 건강한 공동체의 근본 동력이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