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밤섬, 한때 누군가의 집터였다

입력 2014-08-30 03:13
한강 밤섬의 옛 주민들이 추석을 앞둔 29일 서울 마포구가 제공한 배를 타고 ‘고향’인 밤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고 있다. 이들은 1968년 밤섬을 떠나 서울 창전동 와우산 기슭으로 이주했다. 김지훈 기자

밤섬은 서울 영등포구와 마포구 사이 한강에 떠 있는 무인도다. 수십년간 외부에서의 접근이 차단돼 원시림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009년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 이야기를 담은 영화 ‘김씨표류기’의 촬영지로 유명해졌지만 이곳이 한때 누군가의 집이었다는 걸 아는 이들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29일 밤섬을 찾은 유덕문(75) 할아버지는 음미하듯 천천히 땅을 밟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유 할아버지는 태어나서 스물일곱 살까지 이곳에 살았다. 서울시 마포구 율도동(栗島洞) 60번지. 당시 밤섬의 행정 주소다. 유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물놀이 하던 곳, 낚시하던 곳 등을 가리키며 흐릿해진 추억을 되새겼다.

그는 “밤섬은 당시에도 외딴섬이었어. 문명의 이기를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지”라며 40년 전 밤섬의 모습을 설명했다. 전기가 없어 호롱불을 켰고, 수돗물이 없어 한강 물을 마셨다. 그러나 동네에 서로 모르는 이웃이 없을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유 할아버지는 이런 고향을 지근거리에 두고도 마음대로 갈 수 없다. 밤섬이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며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이날은 추석을 앞두고 밤섬 실향민들에게 1년에 딱 하루, 밤섬의 문이 열리는 날이었다.

1968년 여의도 개발 당시 정부는 필요한 잡석 채취를 위해 밤섬 주민들을 이주시킨 뒤 섬을 폭파했다. 율도동이라는 명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밤섬에 살던 442명은 고향을 떠나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으로 이주했다.

섬은 폭파 후 수십년간 자생적으로 생태계를 유지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유 할아버지는 멀리 신촌 방향을 바라보더니 바닥을 가리키며 “이쯤이 예전 우리 집이 있던 곳일 거야”라고 말했다. 그의 눈시울이 잠시 붉어졌다. 지금은 어른 키만 한 갈대와 수풀로 뒤덮여 예전의 집터는 완전히 사라졌다. 유 할아버지는 “이젠 같이 올 친구도 많지 않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지금은 당시 이주민 중 40∼50명만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주민들이 떠난 지금의 밤섬은 사람 대신 철새의 쉼터로 변모했다. 2012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도심 습지로 인정받은 것이다. 사라진 섬 주변으로 퇴적물이 쌓이면서 지금의 밤섬을 이뤘고 면적도 서울광장의 21배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서울시는 밤섬 면적이 1966년 미군이 최초로 측정했던 4만5684㎡에서 매년 평균 4400㎡씩 증가해 현재 27만9531㎡(외곽길이 2895m)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유 할아버지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기까지 했으니 내 고향인 밤섬을 좀더 신경 써서 보호해줬으면 좋겠다”며 “가슴 속에 늘 존재하는 마음의 고향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