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만난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몇 년 전 경남 창원KBS홀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릴 때였다고 한다. 이 연극의 무대라야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전부다. 서울에 있던 그에게 전화가 왔다. 연출가 임영웅(78)이다. “빨리 내려와라. 비행기로.” 그는 두말없이 달려갔다.
빈 객석 한가운데 임영웅이 앉아서 무대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나무를 30㎝만 오른쪽으로 옮기면 좋지 않을까?” 그는 그걸 물어보려 서울에 있던 무대 디자이너를 부른 것이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라는 얘기를 듣고서야 임영웅은 나무를 옮겼다. 그러더니 “확실히 더 나아 보인다”며 “그래. 그럼 올라가도 좋아요”라고 했다. 왕복 비행기표는 임영웅이 부담했다.
그게 임영웅의 방식이다. 나무 한 그루 옮기는 것도 그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겠다는 신념. 그것이 그를 60년 동안 한 분야에서 존경받게 했다.
임영웅의 연출 60주년 헌정작품 ‘가을소나타’가 공연 중이다. 그가 직접 연출했다. 어떤 일을 무려 60년간 해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곧 여든 살이 되는 그는 담담히 말했다. “오래한다고 더 잘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올여름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67)의 ‘불륜’과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65)의 ‘여자 없는 남자들’이다. 두 작가는 나이가 들었지만 글은 늙지 않았고, 그것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불륜’의 주인공은 서른한 살의 여성. 문체는 경쾌하고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마치 그 여자가 된 듯,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이렇게 감각적이고 섬세하고 현실적인 내면을 일흔에 가까운 작가가 쓸 수 있다니! 코엘료는 젊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새로운 세계에서 영감을 얻는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독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일상을 나눈다.
하루키는 또 어떤가.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방황하는 청춘을 대변해온 하루키도 어느덧 60대 중반이다. 단편을 묶은 그의 새 소설집은 주로 중년 남성들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칙칙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관계, 특히 남녀 관계에 대한 고민과 묘사가 더 깊어졌다. 야구장에서 배트가 강속구를 정확히 맞춰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며 문득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1년에 한 번은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며, 여행과 요리와 음악을 좋아하는 하루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는 작가. 그에겐 나이가 들었다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고뇌하는 소설가의 이미지가 없다.
하루키는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자신이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놓고 싶다고.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예전엔 65세면 늙었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이 무료이고, 기초연금을 받을 자격도 주어진다. 직장에선 은퇴했고, 이내 주류 사회에서 밀려나고 만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40대라면 여전히 많은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묘비명을 마음에 갖고 살아야 할까. 우리가 하루키라면 ‘적어도 끝까지’ 다음에 어떤 문장을 채울 것인가.
한승주 문화부 차장 sjhan@kmib.co.kr
[내일을 열며-한승주] 임영웅, 코엘료, 하루키
입력 2014-08-30 0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