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돈 쥬앙(Don Juan DeMarco, 1995), 빅 피쉬(Big Fish, 2003),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의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모두 내가 본 영화라는 점이고 둘째는 모두 현실의 이야기와 공상의 이야기가 병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돈 쥬앙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수녀로 떠난 이후의 삶 속에서 결과적으로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 돈 쥬앙으로 생각하는 망상에 빠진다. 그의 과거는 돈 쥬앙의 일대기로 치환된다. 빅 피쉬에서 주인공은 아들에게 그의 일생의 모험담을 재담꾼답게 늘 늘어놓았지만 아들은 비현실적인 아버지의 표현에 환멸을 느낀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은 조난당한 후 가까스로 보트에 살아남았지만 보트에 함께 탄 호랑이와 함께 생활해야 했고 육지에 다다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한다. 현실의 이야기와 공상의 이야기가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두 이야기 중에서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시나요?”
성서에서 이런 비슷한 대비로 요셉의 꿈(창 37:2∼11)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의 꿈을 듣는 형제들이나 아버지는 그의 꿈이 어떤 내용인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 불쾌감을 나타낸다. 앞서의 영화들과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영화들은 자기의 과거 현실기억을 공상으로 재구성했다고 한다면, 요셉은 꿈에서 자기의 미래를 공상으로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그 꿈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성서에 기록된 것이지 현실화되지 않았다면 성서에 기록될 리가 없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요셉의 꿈은 현실화 여부를 떠나서 어머니를 일찍 여읜 한 순수한 청년이 갖는 자기 가치의 극대화일 뿐이다. 형제나 부모보다 자기가 더 낫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자신은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만큼 꿈에 비해 현실에는 채색 옷 속에 가려진 요셉의 외로움과 불행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공상 혹은 환상이라고 번역되는 판타지(fantasy)는 인간의 매우 독특한 영역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인 것처럼, 판타지는 기대의 실현이며 비현실적인 것들의 구현이다. 판타지는 현실과 매우 흡사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현실과 매우 동떨어지게 나타날 수도 있다. 영화 ‘타이타닉’과 ‘아바타’가 현실성으로는 양극을 달리는 것처럼 보여도 둘 다 비슷한 그래픽 기술로 만들어진 공통점을 갖는 것과 같다. 꿈과 판타지라는 용어는 기준을 세워 구분할 수는 있으나 대부분 혼용해서 사용되며 거의 같은 특성을 갖는다.
여러 특성 중 하나가 정말로 현실에서 구현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특성 때문에 꿈은 늘 가짜에서 진짜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며 진짜가 되는 순간 꿈은 창조성이거나 병적 현상이 되는 것이다. 사실 그보다는 진짜가 되지 못한 채 꿈을 접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해야겠다. 그렇다면 병적 현상이란 참 힘이 좋은 것이다. 비록 모양새는 안 좋다고 해도 어쨌든 중간에 접히지 않고 나름 진짜라는 결과물을 내었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이성과 논리와 과학이 우리의 이상을 실현해줄 것이라는 고도의 속임수에 너무 빠지지 말고 불완전한 자신을 판타지로 채우고 있는 우리 존재를 냉정히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좋은 결과에만 너무 박수를 치지 말자. 그 좋은 결과 하나가 나오는 동안 수많은 꿈의 포기와 정신병적 현상이 주변에 널려있을 테니까. 그 또한 노력의 결과인데 나름의 노력을 인정해주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준다면 조금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진짜가 되고파 꿈틀거리는 나의 꿈이다. “난 꿈이 있어요.” 가수 인순이도 외쳤고, 마틴 루서 킹도 외친 바로 그 꿈.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꿈꾸는 자
입력 2014-08-30 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