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문단열 (5) 학원, 1년 반만에 10배 성장… 그러나 외환위기가

입력 2014-08-29 03:09
1997년 11월 서울 광진구 송정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임명된 뒤 포즈를 취한 문단열 전도사(오른쪽)와 그의 아내 김애리씨. 당시 찾아온 IMF 외환위기로 문 전도사는 생애 첫 고난을 경험하게 된다.

학원을 개업하기 전 서울 강남의 한 학원에서 6개월간 ‘경영수업’을 받았다. 지인이 운영하는 학원이었는데 운영 전권을 위임받아 학생을 유치하고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100명 수준이던 학생 수를 900명까지 늘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1994년 ‘노토어학학원’을 차렸다. 서울 신촌 연세대 앞 한 상가건물 3층이었다. 의외로 돈이 많이 들어갔다. 94년만 해도 학원을 차리려면 점포의 면적이 3636㎡(약 100평) 이상이어야 했다. 은행과 지인들로부터 1억5000만원을 빌려 학원을 개업했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서른 살이었다. 어떻게든 학원을 성공시켜야 했다. 당시만 해도 학원을 홍보할 수단은 전단지와 포스터밖에 없었다. 궁리 끝에 자극적인 광고를 내기로 했다. 자존심 강한 연세대, 이화여대 학생이 많은 신촌 거리에 ‘신촌에는 인재가 없다’는 문구가 적힌 학원 포스터를 붙였다. ‘통일에 반대합니다’라는 포스터도 거리 곳곳에 게시했다. 획일화된 영어교육을 반대한다는 의미였지만 통일에 반대한다는 문구는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학원 개업 첫 달에 등록한 학생은 144명이었다. 이 정도 학생 수로는 매달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교육 콘텐츠가 필요했다. 당시 학원들은 하지 않던 갖가지 아이템을 생각해냈다.

학생들에게 매주 성적표를 줬다. 개인의 성적을 데이터베이스(DB)화해 수강생들이 자신의 실력 향상 추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강사평가제도 도입했다. 학생들에게 학원 강사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해 순위를 매긴 뒤 학원 벽에 게시했다. 매달 말 바비큐 파티를 여는 등 수강생과 교사들 간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이벤트도 자주 했다. 대형 학원들도 안 하고 있던 ‘교육 서비스’였다.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학원은 빨리 자리를 잡았다. 개업 1년6개월 뒤 수강생을 세어보니 1400명이 넘었다. 1년6개월 만에 수강생 수가 10배나 늘어난 것이다. 학원 살림은 ‘흑자’로 돌아섰다. 나는 학원 규모를 키우기로 했다. 건물 4층과 5층을 임대했다. 교실 수를 늘렸고 강사진 외의 직원을 2명에서 5명으로 늘렸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치게 됐다. 97년 말에 터진 IMF 외환위기였다. 수강생 상당수는 과외를 해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고, 이 중 일부를 학원비로 썼다. 하지만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 과외를 하지 않게 되자 수강생 상당수는 자연스럽게 학원에 못 다니게 됐다. 1400명이 넘었던 수강생이 600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시작됐다. 학원 규모를 키우느라 엄청난 대출금을 떠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빚은 5억원이 넘었다.

30대 초반 나이에 이 정도 빚을 감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조건 버티기만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에 학원 운영을 계속했지만 한계가 느껴졌다. 평생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벽에 부닥친 기분이었다. 상황을 타개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채권자들의 독촉이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당시 내 삶에서 중요한 건 나의 ‘체면’이었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 나는 어딜 가든 촉망받는 청년사업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시작되고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하루아침에 나는 ‘사기꾼’ ‘도둑놈’ 소리를 듣는 처지로 전락했다.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모든 게 편안해질 것 같았다.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엔 뭐가 있는지 찾아봤다. 가방엔 항상 수면제를 가득 넣고 다녔다. 내 인생은 끝났다고 여겼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