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전 7시 서울 중구 소공로 플라자호텔로 검은색 자동차들이 밀려들었다. 차에서 내린 이들은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비롯해 방한홍 한화케미칼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허세홍 GS칼텍스 부사장 등 30여명. 수출 감소, 내수 부진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석유화학 업체들의 애로를 듣고 출구를 찾아보자는 차원에서 정부가 만든 자리였다.
간담회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참석자들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P)’ 얘기를 꺼냈다. ‘금속에 도전하는 플라스틱’으로 불리는 EP는 강철보다 강하고 알루미늄보다 얇게 펴진다. EP를 석유화학산업의 미래 성장엔진으로 키우자는 것이다. 정부도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어 얼핏 엉뚱하게 보이는 ‘플라스틱 자동차’가 화제에 올랐다. EP를 이용한 자동차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석유화학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이 왜 자동차에 주목하는 것일까. 자동차 산업과 시장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자동차발(發) ‘산업혁명’ 일어나다
내로라하는 재벌그룹과 기업들이 앞 다퉈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화학업체는 전기차 배터리나 EP, 가전업체는 자동차용 전자장비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정보통신(IT) 업체는 사물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카 시스템을 넘본다.
재계 관계자는 28일 “자동차는 원래 기계, 전자, 화학, 철강 등 모든 산업과 기술의 결정체”라며 “최근 자동차의 중심축이 전기차, 스마트카, 하이브리드 등으로 옮겨가면서 새로운 시장, 새로운 비즈니스가 열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자동차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자동차산업은 세 가지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첫째는 스마트카로 대표되는 차량 시스템 지능화다.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등에서 IT 기술과 기존 제조업의 융합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둘째는 휘발유·경유를 태우는 내연기관 엔진에서 전기 배터리, 모터로 움직이는 엔진으로의 이동이다. 각종 전자장치와 배터리 등이 필수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연비 규제도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에서 연비 규제를 강화하면서 차체 경량화, 친환경 에너지원 사용 등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이미 변화의 조짐은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소재 분야에서 철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자동차 소재에서 철강 비중이 2010년 77%에서 2035년 40% 수준으로 급감한다고 내다봤다. 철강업계가 경량 소재 개발에 주력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철강이 내준 자리는 플라스틱이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 최근 가볍고, 단단하고, 가공이 편리한 EP가 부각되고 있다. 국내 자동차산업에서 플라스틱 비중(전체 중간투입액 대비 플라스틱 제품 중간투입액 비중)은 1990년 4.5%에서 2010년 6.6%로 늘었다. 미국에서는 2010년 5%였던 플라스틱 비중이 2035년 20%까지 급증할 것으로 예측한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전자장비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세계 자동차 제조원가 가운데 전자부품 및 소프트웨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 3%에서 1980년 10%, 2000년 22%, 2010년 30% 등 증가세다. 2030년에는 50%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2차전지, 연료전지, 인버터, 모터 등 전기를 에너지원으로 쓰는 부품이 내연기관 엔진을 밀어내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내연기관 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이 2050년 14%까지 추락하는 반면 하이브리드차(8%),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33%), 전기차(26%), 연료전지차(19%)가 득세한다고 관측했다.
자동차에서 ‘미래’를 보다
기업들은 자동차산업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자동차에서 미래를 본 것이다. 바이오, 사물인터넷, 태양광 등 다른 미래 성장엔진의 성장잠재력이 아직 불투명한데 비해 자동차는 변화의 물길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어서다. 최근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까지 움직이자 기업들의 몸이 달아오르고 있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LG그룹이 적극적이다. LG전자는 지난해 7월 자동차부품사업본부를 신설했다. 올해부터 ‘CIC(Creative Innovation Center) 스마트카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스마트카 융합 솔루션을 개발 중이다. LG화학은 전기차 배터리, EP에 힘을 쏟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EP사업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LG CNS는 전기차 충전 인프라 사업에 뛰어들었다.
삼성그룹에서는 삼성SDI가 자동차 경량화를 위한 부품·소재는 물론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투자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자동차 전자장비 등 스마트카 사업으로 눈길을 주고 있다. SK그룹은 SK이노베이션이 전기차 배터리, SK케미칼이 EP 등에 공을 들이고 있다.
글로벌 IT 업계는 자동차산업을 최대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주목하고 차량용 운영체제(OS) 선점 등에 나섰다. 구글은 2012년 세계 최초로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 도로 시험 면허를 따고 100만㎞ 이상 무사고 주행에 성공했다. 애플은 자동차 전용 운영체제인 ‘카플레이’를 출시했다. 아우디와 벤츠 등 완성차 업체들도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 양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기를 에너지원으로 쓰는 자동차 보급이 늘면 주유소가 사라지는 등 인프라도 바뀌게 된다. 정유업계, 전력업계, 완성차업계는 전기차 충전 인프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일본 후지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세계 전기차 충전 인프라 시장은 2015년 1438억엔(약 1조4023억원)에서 2025년 2901억엔(약 2조8290억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장우석 연구원은 “자동차산업의 지각변동을 새로운 성장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
[경제 히스토리] 그들은 왜 자동차에 ‘필’이 꽂혔나
입력 2014-08-29 0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