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특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보다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 거야’(드라이브 마이 카).
무라카미 하루키(65)가 새 책을 냈다. 단편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문학동네)이다. 그의 소설집은 ‘도쿄 기담집’(2005) 이후 9년 만이다. 지난 4월 일본 출간 당시 예약판매로만 30만부가 팔렸다.
대작 ‘1Q84’(2009)를 비롯한 장편에 몰두해왔던 그는 2013년 직접 선별한 영미권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워서’ 번역 작업 중 문득 ‘장편을 쓰는 것도 지쳤으니 이제 슬슬 단편을 써보는 게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써내려간 작품들이 실렸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독립기관’ ‘셰에라자드’ ‘기노’ 등 다섯 편은 지난해 말부터 올 봄 사이에 발표된 작품. 표제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신간 출간에 맞춰 나왔다. 한국어 판본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걸작 ‘변신’의 독특한 오마주인 ‘사랑하는 잠자’가 작가의 요청으로 특별히 추가됐다.
하루키도 나이가 들었음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투영한걸까. 이번엔 주인공이 중년 남자들이다. 그 때문인지 전작과 비교해 분위기가 현실적이고 진중하다. 남녀를 비롯한 인간관계의 깊은 지점을 훨씬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기존 20∼30대 여성 팬들 보다 40대 이상 중년 남성들의 공감과 관심을 더 얻을 만한 지점이다.
제목처럼 ‘여자 없는 남자들’에 묶인 소설은 연인이나 아내로서의 여성이 부재하거나 상실된 주인공이 등장한다. 병으로 사별하거나, 외도 사실을 알게 돼 이혼하고, 일부러 깊은 관계를 피하기도 한다. 혹은 이유도 모르는 채 타의로 외부와 단절되기도 한다. 하루키는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버림받은 남자들의 상처를 섬세한 필체로 그려낸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예요. 상대가 어떤 여자든 그렇습니다.”(드라이브 마이 카)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자기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고, 그래서 불합리한 힘에 휘둘리는 기분이 든다.”(독립기관)
사실 하루키의 소설은 방황하는 청춘에 바치는 전유물이었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노르웨이 숲’(1987)은 20대 청춘의 성장통을, ‘해변의 카프카’(2005)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숨 막히는 현실을 벗어나 방황하는 소년의 내면을 그렸다.
젊은이들의 방황과 그들의 상실감을 특유의 번뜩이는 문체로 그려왔던 하루키가 이번엔 중년남자, 그것도 여자가 없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그는 일본어판 서문에서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구체적인 사건이 나에게 일어난 것도 아니고(다행스럽게도) 주위에서 실례를 목격한 것도 아니다”며 “단지 그런 남자들의 모습과 심정을 몇 가지 다른 이야기의 형태로 패러프레이즈하고 부연해보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그것은 나라는 인간의 현재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혹은 완곡한 예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책의 제목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중간에 생각이 흔들리지도 않았다”라고 밝혔다.
단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단편소설을 쓸 때 나의 가장 큰 기쁨은 여러 가지 수법과 문체, 상황을 짧은 기간에 차례차례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가지 모티브를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추구하고, 검증하고, 여러 인물을 여러 인칭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음악으로 말하면 ‘콘셉트 앨범’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이번 한국어판의 번역은 ‘1Q84’ ‘중국행 슬로보트’(2014) 등을 옮긴 전문번역가 양윤옥이 맡아 하루키 고유 문체와 각 단편의 개성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또 출간과 함께 하루키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한 가수 윤종신이 동명의 곡을 자신의 프로젝트 ‘월간 윤종신’을 통해 발표했다. 이는 문학과 음악간 최초로 이루어지는 협업으로 문화계 전반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
[책과 길] 하루키, 홀로 된 중년 남성의 상처 어루만지다
입력 2014-08-29 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