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하나가 부러진 커다란 의자가 스위스의 유엔제네바사무국 앞에 서 있다. 이 의자 조각상은 ‘핸디캡 인터내셔널’이라는 NGO가 지뢰금지협정 캠페인을 벌이면서 세웠다. 부러진 다리는 대인지뢰로 다리를 잃은 희생자를 의미한다. 유엔제네바사무국을 마주 보고 있는 이 의자는 마치 전 세계 시민을 대신해 유엔을 지켜보는 듯하다.
유럽에서 NGO의 위상은 유엔제네바사무국을 내려다보는 이 부러진 의자만큼 대단하다. 유엔은 각종 회의에 NGO들의 발언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일찍이 전쟁과 이념혁명을 경험한 유럽의 시민들도 책임감을 가지고 NGO를 후원한다.
하지만 유럽의 NGO들도 이제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유로존의 경제위기가 불거진 2008년 이후 모금액이 줄어들었고, 젊은이들은 이전보다 NGO 활동에 소극적이다. 유럽 NGO들 사이에는 모금부터 지출 및 사후평가까지 모든 활동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자선을 넘어 사회변화까지 추구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유럽의 젊은이들은 과연 NGO들이 이 시대 지구촌 문제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는지 의문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투명성과 책임감을 넘어 NGO의 운영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럽에서 활동 중인 인권운동가 곽은경(사진)씨는 지난 5일 제네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요즘 유럽 NGO의 최대 과제는 유럽 바깥에서 사용하는 현장활동비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라며 “이 때문에 유럽연합(EU) 안에 있던 사무소를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옮기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네덜란드의 구호개발NGO 코드에이드는 상근자 수를 10분의 1로 줄였고, 작은 단체끼리 통합하는 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곽씨는 “NGO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 세계 기독교NGO의 연합체로 떠오르고 있는 ‘액트 얼라이언스(Act Alliance)’도 이런 지각변동으로 탄생했다. 이 단체는 긴급구호 활동을 해온 ‘액트 인터내셔널’과 지역개발 사역에 집중했던 ‘액트 디벨로프먼트’가 2010년 통합한 곳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관련된 국제NGO 146개 단체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고, 매년 16억 달러가 넘는 예산을 움직인다. 액트 얼라이언스는 NGO들의 연합과 협력이 새로운 흐름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협력을 위해서도 투명성은 핵심적인 의무다. 액트 얼라이언스의 산드라 콕스 홍보담당관은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선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제적 회계전문법인의 엄정한 감사를 받겠다는 서명을 해야 한다”며 “규모가 작은 단체들도 액트 얼라이언스의 회원이 되면서 후원자들의 신뢰를 얻고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협력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습 당시 액트 얼라이언스는 회원 단체들의 협력을 통해 의료와 식량, 교육 등의 긴급구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서로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협력이 가능했다. 장 다니엘 비르밀 회계국장은 “지난해에도 4개 단체가 회계감사에서 부정이 적발돼 회원 자격을 잃었다”며 “부정 규모가 몇천 달러 수준이어서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연합을 위해선 조그만 오점도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은 NGO를 통하지 않고 직접 도움을 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곽씨는 “유럽의 젊은이들이 NGO에 후원을 적게 하는 이유는 해외여행 등을 통해 알게 된 곳에 직접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며 “NGO를 통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고 비효율적이지만 개인적인 신뢰도나 만족감은 더 높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유럽의 시민들이 농산물이나 공산품을 고를 때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된 추적 가능한 제품’이나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는 기업이 만든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스위스 출신의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미디어와 대량생산 제품에 수동적으로 의존해온 대중의 취향이 즉각적이고 상호적이며 진보적인 판단에 따라 선택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국제적인 연대 활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곽씨는 진단했다.
“불신의 시대에 시민들은 내가 직접 사업현장에 가 볼 수 있고, 인간적 관계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 같아요. 에어프랑스나 프랑스전력(EDF) 같은 대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비영리재단을 설립해 활동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난 10여년간 급성장해온 한국NGO 역시 외형에 걸맞은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이런 지각변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제네바=글·사진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구호개발 NPO의 신뢰도 분석 평가] (⑦·끝) 유럽 NGO의 변화 바람
입력 2014-08-28 0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