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인 진도대교가 1984년에 개통되자 진도군청 공무원 한 사람이 육지로 출장을 나오게 되었다. 해남 들녘을 지나던 그는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매는 농부를 보고 “진도에서는 여자가 농사일을 하는데 육지에서는 왜 남자가 하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한다.
남녀평등이 목소리를 높일 때도 진도에서는 남자가 하늘처럼 받들어야 할 귀한 존재였다. 힘든 농사일과 온갖 궂은일은 여자가 도맡아 하고 남자들은 그저 창이나 부르며 빈둥거렸다고 한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남자가 귀한 진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고.
진도의 남자는 역사적으로 두 번이나 떼죽음을 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왜적들에게 학살당하고, 고려 때는 반란군인 삼별초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몽고군에 의해 남자들은 씨가 마를 정도로 떼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남자가 없어 여자가 상여를 멨을까.
진도에는 명량해전 못잖게 삼별초와 관련된 역사 현장이 많다. 1270년 고려가 몽고에 백기를 들자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은 이에 반발해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한다. 자주의 깃발을 높이 든 배중손은 군사와 가족 등 2만여명을 데리고 벽파진과 가까운 군내면 용장리에 상륙해 새로운 고려왕국을 꿈꾼다.
계단식 터만 남은 용장성 행궁터는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배산임수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족함이 없다. 지금은 행궁터 앞 바다가 간척사업으로 인해 들판으로 변했지만 당시엔 1000여척의 배가 동시에 닻을 내릴 만큼 너른 바다였다고 한다. 배중손은 이곳에 왕이 머물 행궁 건설에 나섰지만 상륙 9개월 만에 여몽연합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다.
진도읍에서 운림산방으로 가는 길목의 왕무덤재를 넘으면 용장성에서 패퇴한 삼별초의 흔적을 만난다. 왕온은 이곳에서 몽고 장수 홍다귀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후 진도사람들에 의해 송림 우거진 야산에 몰래 묻힌다. 왕온이 잡힌 곳은 목을 치느먀 마느냐로 논란을 벌였다고 해서 논수동(論首洞)이란 지명이 붙었고, 논수동 옆 개울은 삼별초군의 피로 물들었다고 해서 핏기내란 이름을 얻었다.
패퇴하던 삼별초군은 의신면 돈지리 앞 들판에서 여몽연합군에게 또 한 차례 살육을 당한다. 살아남은 김통정은 금갑진에서 배를 구해 제주도로 탈출하고 배중손은 남도진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뒤따르던 가족과 궁녀 등 1000여명의 아녀자들은 깊은 연못인 급창둠벙에 몸을 던진다. 백제의 삼천궁녀를 연상케 하는 애환을 남긴 연못도 간척공사로 대부분 메워져 지금은 비가 와야 물이 차는 손바닥만한 연못으로 변했다.
배중손 장군이 최후를 맞은 임회면의 남도진성은 둘레 610m, 높이 4∼6m로 거북 모양이다. 담쟁이덩굴이 성벽을 휘감은 성 안엔 팽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20여 가구 주민들은 성벽을 담장 삼아 농사를 짓고 산다. 남도진성을 휘돌아 흐르는 개울에는 2기의 홍교도 남아 있어 성벽을 따라 걸으면 어느새 고려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반란군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삼별초가 역사의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5·16쿠데타 세력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최근 영화 ‘명량’이 한국 영화사에서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진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삼별초의 역사 현장도 재조명을 받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고산 윤선도가 심었다는 노송 한 그루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임회면 굴포리 바닷가. 그곳에서 동상으로 다시 태어난 배중손 장군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하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오른손을 불끈 치켜들고 있다.
진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삼별초는 진도서 무슨 꿈을 그렸나… ‘대몽항쟁의 최후 보루’로 재조명
입력 2014-08-28 03:53 수정 2014-08-28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