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문단열 (4) 대학커플 아내, 데이트 후엔 꼭 “기도하고 헤어져요”

입력 2014-08-28 03:37
문단열 전도사와 아내 김애리씨. 동갑내기 친구인 두 사람은 대학 시절 처음 만나 1989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대학 시절 내내 영어 공부에 열중했지만 전공인 신학과 수업을 아예 무시할 순 없었다. 졸업을 하려면 수업을 들어야 했고 숙제도 하고 시험도 치러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신학생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살았을 법한 신학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신학과 교수님들의 가르침은 내 삶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내가 다닌 연세대 신학과는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곳이 아니었다.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상식의 신학을 가르친 학교였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었다.

가령 상당수 학생들은 진학과 동시에 자신의 신앙이 무참히 박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교수님들은 신입생들에게 하나님을 부정하는 책들을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학생들은 무신론을 주장한 영국 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의 저작 등을 읽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얄팍한지 실감했다. 어떤 학생들은 신앙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음주나 흡연을 즐겼고 교회를 멀리했다.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과정을 밟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무신론 같은 이론을 극복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교역자가 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교수님들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신앙의 변증’이 없다면 참된 신앙을 키울 수도 없는 법이니까.

아울러 연세대 신학과는 내가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의 아내를 3학년 2학기 때 처음 만났다. 내가 ‘영문과 학생 같은 신학생’이었다면 아내는 ‘신학생 같은 영문학도’였다. 내가 영문과 수업을 일부러 들었듯 아내는 신학과 수업을 챙겨 들었다. 아내는 독특한 신앙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기독교인이 아닌 상황에서 중학교 때 혼자 교회를 갔다 믿음을 키우게 된 인물이었다. 믿음이 신실해 연애시절 데이트를 하고 헤어질 때면 내 손을 잡고 “기도하고 헤어지자”고 말할 정도였다. 우리 두 사람은 1989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 시절 내내 영어에 매진했지만 유학은 언감생심이었다. 80년대는 국비 유학생에 뽑히지 않으면 유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20대 시절 유학 경험이 없다는 게 아쉽지 않은지 묻곤 하는데 당시엔 큰 불만이 없었다. 첫 직장부터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민병철어학원에서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실감했다. 아울러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민병철어학원에서 3년 넘게 근무하다 지인이 서울 신촌에 학원을 차려 첫 이직을 했다. 지인의 학원에서 6개월 정도 일했고 다른 학원도 떠돌며 강의를 했다. 그러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를 맺은 92년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중국어도 잘하고 싶었다. 나는 베이징에서 6개월간 머물며 중국어를 배웠다. 영어를 통해 어학 공부의 재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국어 공부 역시 흥미로웠다.

한국에 돌아오니 내 나이는 어느덧 20대 후반이었다. 대학생 시절부터 나의 궁극적인 꿈 중 하나는 교육기관 설립이었다. 한국외국어대 같은 외국어 전문 기관을 세우고 싶었다. 이제 그 꿈을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을 차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울 강남에서 한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학원 관리하는 일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나는 그 학원에 실장으로 취업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94년 서울 연세대 앞 한 건물 3층에 학원을 차렸다. ‘노토어학학원’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학원 운영에 자신이 있었다. 누구보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원 사업이 고난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걸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