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신국원] 폭력의 문화

입력 2014-08-27 03:34

영화 ‘명량’을 보러 갔던 한 관객이 부모와 함께 온 꼬마들이 소란을 피우자 참다못해 나와 환불을 받았다는 사연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15세 관람’ 등급이지만 아이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어 이런 일이 자주 생긴답니다. 이를 두고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체로 부모를 탓하는 분위기입니다.

‘명량’이 아무리 좋은 영화라 해도 아이들이 봐도 좋을지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 목을 베어 효수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고 피투성이 전투가 한 시간 가까이 생생하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예수의 수난을 그린 영화에서도 십여 분이나 계속되는 끔찍한 고문과 처형 장면이 아이들에게 유익할지 해가 될지에 대해 논란이 적지 않았습니다.

폭력에 대한 예술적 묘사의 유해성 논란은 아주 오래됐습니다. 플라톤은 예술의 해악을 질타했는데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명한 카타르시스 이론으로 상반된 주장을 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람마다 받는 영향이 다를 수 있기에 일률적으로 특정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도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상식을 거스릅니다.

로마의 검투사 경기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구경거리였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로마 사회에서 그 누구도 비판을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네카 같은 스토아 사상가나 명상록을 쓴 철인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초대교회 교부 중 터툴리안 같은 이들만이 용감하게 질타했습니다. 검투사 경기는 438년에서야 완전히 폐지됐는데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직접 칼을 들고 적군을 죽여야 했던 시대인지라 잔혹함에 대한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피비린내 나는 살상을 축제처럼 즐기고 잔인함을 용기로 칭송하는 문화에 젖어 문제의식조차 없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황제가 이를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판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다른 안목으로 그 문화를 비판할 용기를 가졌다는 건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빠져 있는 게임 대부분은 검투사 경기보다 더 잔혹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상상 가능한 모든 무기를 동원해 찌르고 베고 머리를 쏴 날려 보내는 게임들이 적지 않습니다. 시뮬레이터처럼 인간을 살인자로 훈련시키고 있다는 주장이 과장만은 아닌 듯 합니다.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조건반사적으로 뇌를 폭력적이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집에서는 동생을, 학교에서 후배를, 군대에서는 후임병을 학대하는 것이 과연 놀랄 일일까 싶습니다.

컴퓨터 게임이나 영상에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된 폭력이 아이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논란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폭력은 문화가 아니라 야만입니다. 그저 옛날에는 황제가 무섭고 시대적 상식을 거스르기 두려워 비판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은 학교와 군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비판과 반성은 사건이 났을 때 잠시뿐입니다. 기독교인들만이라도 폭력적 문화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발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에 앞서야 할 것입니다.

신국원 교수(총신대 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