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문단열 (3) 영어는 세상을 보는 창…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

입력 2014-08-27 03:59
문단열 전도사(왼쪽 세 번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경주 여행을 갔다 찍은 사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느 대학에 진학할지 고민이 많았다. 전공보다는 학교 ‘간판’을 우선해야 할지, ‘간판’보다는 내가 원하는 학과가 중요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영문학이나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학교의 명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결정한 곳이 연세대 신학과였다. 목회자인 아버지의 뜻이 컸다. 아버지는 아들이 언젠가 목사가 될 수도 있으니 미리 신학을 공부해 놓으라고 조언했다.

반면 어머니는 아들의 신학과 진학을 마뜩잖아 했다. 아버지가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겪은 고충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목사가 목회만 하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때론 ‘정치’도 해야 한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신학에 큰 뜻이 없다 보니 학과 수업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 전공과목 학점 대부분은 C 혹은 D였다. 모든 관심은 영어에 있었다. 영문과 수업을 신청하거나 도강(盜講)해 영문과 학생처럼 대학시절을 보냈다.

당시 영어가 좋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영어는 세상을 보는 창(窓)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선교사 자녀인 카일과 친분을 쌓으면서 ‘타임’과 같은 미국의 시사주간지를 볼 기회가 많았다. 타임엔 한국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는 우리나라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보도되고 있었다. 해외 신문이나 잡지들을 읽다 보니 영어를 알아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또 하나의 이유는 영어가 나의 생계수단이 될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다. 영어가 가능해야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영어는 다른 세계와 조우하는 가교였다. 어학에 미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의 이런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활 대부분을 보냈던 곳은 ‘YES’(연세 잉글리시 소사이어티)라는 영어회화 동아리였다. 나는 대학시절 내내 이곳 동아리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스터디 그룹을 조직해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고 후배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쳤다. 방학 때도 스터디 그룹을 계속 운영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루에 10시간 이상 영어 공부에 매진한 것 같다. 공부를 하지 않을 때에도 영어 생각밖에 없었다. ‘자, 내 앞에 외국인이 앉아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지금 어떤 말을 할까. 어떤 식으로 내 생각을 영어로 풀어내야 할까….’

어학 공부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과 비슷하다. 비행기는 연료의 상당량을 이륙하는 데 소진한다. 하지만 일정 궤도에 올라가면 연료를 많이 쓰지 않는다. 어학 공부 역시 처음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면 큰 힘이 들지 않는다. 3∼4개월만 미친 듯 공부해도 확연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쾌감을 맛보면 어학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외국인의 발음과 리듬을 체화하는 기쁨은 엄청나다.

대학시절 내가 정한 진로는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나의 통번역대학원 합격을 따놓은 당상이라 여겼다. 하지만 대학원 입시에서 나는 두 차례나 낙방하고 말았다. 수석이 목표였는데 합격조차 못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진로를 고민했지만 신학생이 갈 만한 회사는 별로 없었다. 대기업 입사는 상경계열이나 이공계열 전공자여야 가능했다. 결국 나는 졸업을 앞둔 1986년 12월 서울 강남에 있던 민병철어학원에 입사했다. 누군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