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자주 학교를 옮겼다. 아버지가 전국 각지의 교회를 전전하며 전도사로 사역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만 열거해도 화랑초등학교(서울) 순천남초등학교(전남) 화계초등학교(서울) 창경초등학교(서울) 남성초등학교(대전) 등 다섯 곳이나 된다.
새로운 학교에 가면 아이들 텃세에 시달리곤 한다지만 내 경우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덩치가 컸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5년 대전으로 이사를 가면서 비로소 한 지역에 ‘정착’하게 됐다.
늘 과묵했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부모로서 극성스러운 면이 적지 않았다. 내가 영어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한 데도 어머니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동네 영어학원에 보냈다. 6학년 형들이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다니는 학원이었다. 오래 다니진 않았지만 아홉 살에 영어 알파벳과 기본 문법을 배우고 나니 영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절부터 영어를 유창하게 했던 건 아니다. ‘외국인과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기분이 어떨까’ 상상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영어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어머니의 교육열이 발단이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내게 미국인 친구를 소개시켜줬다. 미국인 선교사의 자녀로 이름은 카일이었다. 카일을 만나자마자 나는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영어로 나를 소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어문장을 구사하며 질문을 쏟아냈다. ‘네 이름은 뭐니?’ ‘어느 나라 사람이니?’ ‘너희 아버지 이름은 뭐니?’. 그렇게 20분이 흘렀다. 그리고 그 20분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전까지 내게 외국인은 외계인과 다를 게 없었다. 인간이긴 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거의 없었으니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을 만나면서 ‘아, 서양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첫 만남 이후 6개월 넘게 카일과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카일을 통해 다른 외국인 친구도 소개받았다. 대전에 파송된 외국인 선교사들 자녀였다. 난 본격적으로 이들로부터 영어 과외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과외비였다.
전전긍긍하다 떠오른 묘수는 과외를 통해 과외비를 벌자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초등학생 6∼7명을 상대로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초등학생으로부터 받은 과외비를 모으니 7만원 정도 됐다. 이 돈을 들고 외국인 친구들을 찾아갔고, 이들에게 돈을 내고 영어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을 가르친 돈으로 외국인 친구들에게 과외를 받는 일상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계속됐다. 주한미군방송(AFNK)도 열심히 들었고 학교에서 영어시험을 치르면 거의 매번 100점을 받았다.
당시 외국인 친구들은 은연중에 한국인 아이들을 깔보곤 했다. 그들에게 한국은 세계의 수많은 후진국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한국인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기분이 상했다. 나의 목표는 단순했다. 미국인과 영어로 말싸움을 벌여 이기고 싶었다.
영어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과 달리 나의 신앙은 보잘것없었다. ‘절반의 신앙’이었다. 목회자인 아버지를 뒀으니 각종 성령집회와 금식기도에 참여했지만 당시 내가 알던 하나님은 ‘승리자의 하나님’이었다. 주님을 믿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벼랑 끝에 선 인간까지 보듬는 ‘실패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훗날 30대가 돼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역경의 열매] 문단열 (2) 중3, 내 인생을 바꾼 외국인과의 첫 영어 대화
입력 2014-08-26 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