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했던 지하 공간에 문화 들여놨다

입력 2014-08-25 04:34 수정 2014-08-25 16:01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던 서울 방학동 극동아파트 지하실(아래)이 지금은 카페 공방 쉼터가 있는 ‘햇살문화원’으로 변모했다. 이름뿐인 대피소로 방치된 곳을 지난해 9월부터 주민들이 힘을 합쳐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이 작은 아파트 단지의 지하실에 이런 게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을 하겠어요. 이곳은 신세계예요."

지난 19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 극동아파트 101동 지하실의 '햇살문화원'에서 만난 최경민(39·여)씨는 이렇게 말했다. 약 231㎡ 넓이의 이곳은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든 공동 문화공간이다. 카페와 공방, 이야기 쉼터 등 여느 문화센터 못지않은 시설을 갖췄다.

최씨는 "햇살문화원이 생긴 뒤로 단조롭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냅킨공예 작업에 한창이었다. 곧 있을 시어머니 생신 선물이라고 했다. 최씨 앞에는 직접 만든 작품 여러 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흔히 사람들이 떠올리는 아파트 지하실은 컴컴하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이다. 이곳도 그랬다. 거미줄과 먼지로 가득했던 지하실은 지난해 9월 주민들이 나서서 손수 페인트칠을 하고 장판을 깔고 소파와 책상 등을 갖다놓으며 새로운 문화시설로 거듭났다. 집기 대부분은 주민들이 기증했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행운카페', 아이들이 한문을 배우는 '봉숭아학당', 못 쓰는 프라이팬이나 다 쓴 분유통 등을 재활용해 화분이나 시계를 만드는 '민들레 공방', 다용도실 '하하호호' 등이 음침했던 지하실에 들어섰다.

이곳에서는 월∼목요일 내내 문화 강좌가 열린다. 외부 강사를 초빙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파트 주민의 재능기부로 진행된다. 다양한 재료로 수공예 작품을 만드는 토털공예 강사 한경애(38·여)씨도 주민이다. 외부 출강을 다니느라 바쁜 와중에도 매주 2∼3시간씩 꼭 시간을 내서 문화원에 들른다. 지난 6월엔 문화원 사람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으로 도봉구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한씨는 "어떤 주민은 밤늦은 시간에도 짬을 내 문화원으로 내려와서 작업을 한다. 실력과 열정이 대단해 뿌듯하다"며 활짝 웃었다.

주기적으로 햇살문화원을 찾는 주민은 50명 정도. 이 단지가 2개동 167가구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꽤 반응이 좋은 편이다. 집안일만 반복하는 생활에 지루했던 주부들이 이곳에서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날 문화원을 찾은 이정남(45·여)씨는 "일주일에 한 번 캘리그라피(손글씨) 수업이 있는 날이라 아르바이트도 하루 쉬고 나왔다"며 "배우는 즐거움도 있고 동네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도 재미있어 자주 온다"고 말했다.

다른 아파트에도 입소문이 제법 났다. 옆 동네에서 차로 15분을 달려 매주 이곳에 온다는 정광례(42·여)씨는 "구청에서 열린 전시회에 갔다가 햇살문화원을 알게 됐다"며 "매일 집에만 있던 지루한 삶에서 뭔가 주체적으로 할 거리들이 생겨 즐겁다"고 했다.

극동아파트처럼 지하실을 갖춘 아파트 단지는 서울에만 581개나 된다. 대부분 1990년대 지어졌다. 그러나 이곳처럼 지하실을 주민 문화공간으로 사용하는 곳은 드물다. 주민들 사이에서 문화공간 설립 사업이 추진되더라도 입주자 대표 회의에서 승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부 주민이 지하실에 외부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꺼리기도 하고, 공동 공간이 생기면 관리에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도봉구의 다른 아파트에서도 지하실을 주민공간으로 만들었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관리 문제가 생겨 결국 문을 닫았다.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김정빈 교수는 햇살문화원에 대해 "지역주민들의 여가 활동 수요를 버려진 공간인 아파트 지하실을 통해 해소한 좋은 사례"라며 "아파트 공동생활과 지역사회 활성화 측면에서도 좋은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가 운영하는 '창조도시공간발전소'는 햇살문화원을 모방한 '잃어버린 공간' 사업을 진행 중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한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글·사진=황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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