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잠깐 가지고 노는 인형이었어요. 엄마는 내게 있는 예민하고 섬세한 것들을 멍들게 하고, 살아있는 것들은 숨통을 틀어막으려고 했어요.”(에바)
“난 엄마라는 내 모습이 어색하고 불안했어. 난 네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어.”(샬롯)
엄마(손숙)와 딸(서은경)의 가시 돋친 대화가 관객의 폐부를 찌른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연기 호흡,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이다. 지난 22일 막을 올린 연극 ‘가을소나타’의 한 장면이다.
엄마 샬롯은 유명한 피아니스트. 성취욕과 자기애가 강한 그는 두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런 엄마의 그늘 밑에서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며, 나아가 감정의 폭력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딸 에바. 7년 만에 만난 모녀의 대화는 서로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 잔인하다. 100분간의 연극은 주로 두 사람의 팽팽한 심리 대결과 촌철살인의 대사로 채워진다.
두 배우의 연기와 함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갈색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무대다. 나무 계단을 매개로 2층으로 나눠져 있다. 2층 창밖으로는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가을이다. 1층은 나무 바닥과 책장이 있는 갈색 톤의 거실과 서재, 그리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조명은 은은하다.
제목 ‘가을소나타’의 느낌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이 무대는 디자이너 박동우가 만들었다. 쇼팽의 전주곡 등 배경음악도 클래식으로 채워진다. 애증이 가득한 모녀의 날카로운 대사는 가을을 닮은 무대와 소나타의 경쾌함 속에 점차 무뎌진다. 연극이 결국은 ‘화해’라는 메시지로 관객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9월 6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연극 ‘가을소나타’는 개막 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한국 연극계의 대부’ 임영웅(78)의 연출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이기 때문이다.
그는 데뷔작 ‘사육신’을 비롯해 ‘고도를 기다리며’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그리고 최근작 ‘챙!’까지 60년간 꾸준히 활동하며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로 존경받고 있다. ‘가을소나타’ 역시 무대장치나 조연들의 도움 없이 오롯이 탄탄한 대사와 주연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로 ‘정공법’ 승부를 펼친다.
그동안 임씨가 길러낸 후배들도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 배우 손숙,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등이다. ‘가을소나타’는 이들 ‘임영웅사단’이 뭉쳐 마련한 헌정무대로 임씨가 연출을 맡았다. 지난 22일 개막 공연 전에 만난 그는 “60년 했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60년이나 좋아하는 연극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할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가을소나타’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해 온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르히만의 1978년 동명의 영화를 각색한 작품. 임씨는 “베르히만 감독이 국립극장 예술감독 출신이라는 것을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른다. 스웨덴 작품은 처음인데 우리나라에 소개가 안 된 작가의 작품을 알리자는 뜻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삶과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무대 위의 삶을 지켜보면서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총 4명이 출연하는 이 작품에는 배우 손숙 서은경과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명구, 신예 이연정이 함께한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
애증 가득한 모녀의 ‘화해’… ‘한국 연극계 대부’ 임영웅 연출 60년 기념 공연 ‘가을 소나타’
입력 2014-08-26 0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