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글에 “이 시대에 침묵은 박쥐의 행위와 행색에 다름 아니다”라고 박쥐에 빗대 쓴 구절이 마음에 걸린다. 박쥐가 어쨌다고, 박쥐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박쥐는 스스로 쥐라고 한 적 없고 새라고도 하지 않았다. 거꾸로 매달려 박쥐의 생을 묵묵히, 교미하고 위험천만하게 새끼 낳고 열악한 환경에서 지성으로 새끼 기르며 열심히 사는 갸륵한 온혈동물일 뿐이다. 그만 박쥐에게 망발하고 말았다, 박쥐에게 진정 미안하다.
누군가를 폄훼하는 댓글에서 흔히 “개 같은, 개보다 못한, 뱀처럼 사악한, 앙큼한 고양이 같은, 짐승보다 못한, 닭대가리” 등을 자주 접한다. 그나마 점잖은 편인 것만 옮겼는데, 저런 표현에 맞닥뜨릴 때마다 이 말이 나온다. 아니 개는 무슨 죄야? 앗, 뱀의 명예훼손! 고양이는 왜? 아니 닭이 어쨌기에? 이렇게 저렇게 따져 봐도 당사자 동물에게는 그저 모욕이 될 비유이다.
주인을 구하고 자기는 지쳐서 그예 죽은 ‘오수의 개’가 천년 전 미담만은 아니다. 수많은 ‘오수의 개’가 여태 있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형편없는 인간종자를 어찌 그토록 숭고한 개와 비교해 말하는 무례를 함부로 저지르는가. 개에게 미안하다.
식육의 제단에 소 돼지 제물들과 함께 바쳐진 거룩한 닭. 방목하는 닭이 높은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둥지 틀고 알 품어 부화시키는 광경을 보았는지. 적과 위험에서 제 새끼를 지키겠노라고 암탉은 나무 위 둥지에서 한결같았다. 제 목숨을 초개로 여겼다. 가없는 새끼사랑이 보는 이의 심금을 적셨다. 사람아, 아름다운 닭을 어찌하여 욕보이느냐. 닭에게 미안하다.
“뱀처럼 사악한” 이렇게 매도당하면 뱀도 뱃속을 뒤집어 보여주고 싶을 만큼 억울할 터이다. 뱀이 어떤 사악한 짓을 했느냐. 뱀은 유혹하지 않는다. 뱀은 거짓 없고 조용하다. 자기 생명이 위협 받지 않는 한 뱀은 고요히 지난다. 검정단추 같은 뱀의 순한 눈을 보아라. 사람의 어느 두 눈이 뱀의 눈처럼 무심 무욕할 수 있을까.
몽골불교의 탱화 어느 부분이던가. 다른 생명에게 여러 형태로 고통 주며 괴롭힌 자가 죽으면 저승에서 자기 한 짓 그대로 똑같이 죄의 대가를 받는 참혹한 그림이 있다. 함무라비법전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인 그림이다. 그럴 것이다. 사실일 것이다. 고통 받는 힘든 이들이 번연히 있건만 힘이 되지 못하여 진실로 미안하다. 죄의 값을 신(神)은 기억하리.
우선덕(소설가)
[살며 사랑하며-우선덕] 미안하다, 미안하다
입력 2014-08-25 0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