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문단열 (1) 평일에는 영어 전도사… 주일엔 복음 전도사

입력 2014-08-25 03:28
24일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한 영어학원에서 만난 문단열 전도사. 국내 대표적인 인기 영어강사다. 허란 인턴기자

사람들은 나를 ‘영어 전도사’라고 부른다. 수많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영어 강의를 하며 이름을 알렸고, 영어 관련 책도 여러 권 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영어 전도사’이면서 동시에 ‘진짜’ 전도사이기도 하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했고 2011년 11월부터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어메이징 그레이스교회’를 개척해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다. 평일엔 ‘영어 전도사’로, 주일엔 ‘복음 전도사’로 살고 있다.

TV에 출연하거나 강단에 설 때는 항상 밝은 표정을 지으니 독자들이 내 삶에서 ‘역경’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을 듯하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스타 강사’로만 여기는 분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에도 굴곡은 있었다. 처음 영어강사로 나설 때는 유학 경험이 없는 ‘토종 강사’라는 점이 핸디캡으로 작용해 난관에 부닥칠 때가 많았다. 사업에 실패해 큰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목회자였던 아버지(고 문홍지 목사)의 가르침과 신앙의 힘이 없었다면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64년 3월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아들 이름을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 이름 ‘다니엘’로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는 호적에 외래어 어감의 이름을 올릴 수 없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고민 끝에 ‘단열’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제단 단(壇), 기뻐할 열(說)을 붙인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기쁨의 제단이 되길 바랐다. 신앙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장남 이름을 이렇게 지은 데는 당신의 신앙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고향인 아버지는 어린 시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집안과 동네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출해 고학하며 꿈을 좇았던 분이셨다. 장로회신학대를 나와 젊은 시절엔 서울 순천 제주 대전 등 전국 각지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아버지는 완고한 분이셨다. 다정다감하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엔 이런 아버지가 싫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항상 아버지를 향한 존경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성도들 앞에서 설파한 복음과 항상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성공과 물질을 강조하는 목회자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서울 광진구 송정교회에서 2003년 은퇴한 뒤 제주로 낙향해 귤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2010년 폐섬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폐섬유증은 폐가 굳으면서 기능이 떨어지고 결국엔 심한 호흡곤란으로 목숨을 잃는 희귀질환이다. 아버지는 투병 중에도 의연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아버지, 죽음을 지척에 두신 기분이 어떠세요?”

“아주 스릴이 느껴진다. 기분이 참 좋구나(웃음).”

마지막까지 아버지는 근사했고 멋있었다. 아버지는 평생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분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했고, 한국교회가 성공이나 돈을 좇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권위적인 가부장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유교적인 위계가 없는 집안이었다. 우리집에선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자신만의 논리로 설득시켜야 했다. 아버지는 주일마다 예배가 끝나면 나를 불러 당신의 설교 내용을 요약하라고 주문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가정환경은 내게 큰 도움이 됐다. 강연과 강의가 나의 ‘직업’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논리 훈련을 받고 설교 내용을 요약해 아버지께 말했던 경험이 내 밥벌이의 밑천이 된 것 같다. 아버지가 설교를 통해 전한 복음은 자연스럽게 내 삶에 녹아들었다.

약력=1964년 서울 출생. 연세대 신학과 졸업. 2002∼2008년 EBS '잉글리시 카페' 진행. 2009∼2012 MBC '뽀뽀뽀' 출연. 현 성신여대 교양교육원 교수. 잉글리시 대표 강사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