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탄생 110주년] 벤치마킹 나선 시진핑… 정치·사회개혁 없인 덩샤오핑 못 넘는다

입력 2014-08-23 03:46

중국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을 수식할 때는 으레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말을 붙인다. 22일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을 앞두고 다양한 기념 활동이 펼쳐졌다. 여기서도 주제는 바로 개혁과 개방이었다. CC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역사 전환기의 덩샤오핑'은 전 생애 중 1976년 문화대혁명을 이끈 '4인방'을 분쇄한 것으로 시작해 1984년 개혁개방 전면 실행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공산당의 모든 매체들이 동원돼 쏟아낸 덩샤오핑 추모 글도 역시 주제는 마찬가지였다. 공산당 중앙당교 셰춘타오 주임은 "개혁개방은 덩샤오핑의 중요 공헌으로 덩샤오핑을 기념할 때 이를 떼놓고 논할 수 없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시각에서 봤을 때 우리도 개혁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올해를 전면심화개혁 원년으로 선언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펼치고 있는 대대적인 국가 개혁 작업의 역사적·이론적 정당성을 덩샤오핑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이 공산주의가 아니다…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덩샤오핑은 10년간의 문화대혁명 이후 통치를 구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경제 발전을 지속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학생 지도자 왕단은 그의 저서 ‘중화인민공화국사 15강’에서 이렇게 썼다.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새로운 중국도 없었다. 마오의 공은 7할이고 과가 3할(功七過三)”이라며 과거사를 명쾌하게 정리한 덩샤오핑은 “가난이 공산주의가 아니다”며 개혁개방에 시동을 걸었다. 전환점은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3중전회)에서 ‘시장’과 ‘계획’을 병행해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중국특색 사회주의’의 서막이었다.

내부 개혁의 핵심은 자본주의 도입이다. 공동경작 공동분배의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개인에게 일부 경작권을 줬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본주의의 찌꺼기’라고 비판받던 중소상공업자 ‘개체호(個體戶)’를 부활시켰다. 대외 개방의 시작은 1979년 미국과의 수교다. 덩샤오핑은 대외 개방, 외자 유치, 대외 무역 확대를 통해서만 중국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고 봤다. 이후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와 푸젠성의 샤먼 등 경제특구를 만들었다.



#흑묘백묘(黑猫白猫)론과 중국 경제 발전의 결정적 사건 ‘남순강화’ 그리고 선부론

덩샤오핑 개혁개방 정책의 기본 이념은 ‘흑묘백묘론’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듯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인민만 잘살게 하면 상관없다는 얘기다. 덩샤오핑은 1987년 2월 중앙부서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왜 시장을 말하면 자본주의고 계획을 말하면 사회주의가 되는가. 계획과 시장은 모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단지 경제 발전을 위해 좋다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계획, 시장 이런 것들을 사회주의에 이용하면 사회주의인 것이고 자본주의를 위해 이용하면 자본주의인 것이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적 태도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진압 이후 보수파가 전면 복귀하면서 개혁개방이 자칫 좌초할 위기에 처했다.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광둥성 선전과 주하이 등 남부지역을 한 달간 돌면서 가는 곳마다 ‘개혁의 심화’를 역설했다. 바로 남순강화(南巡講話)다. 덩샤오핑의 반격은 정치적 국면을 완전히 역전시켰고 중국에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시켰다. 중국 경제 발전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인민을 잘살게 하는 방법론은 바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부자가 되게 하라’는 선부론(先富論)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확립이라는 성과를 내긴 했지만 빈부격차 부정부패 환경오염 등 오늘 중국이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남겼다.

#머리는 덩샤오핑, 가슴은 마오쩌둥?…시진핑은 역사에 남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중국 매체들은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을 맞아 덩샤오핑과 시진핑 주석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대공보는 한 평론에서 시 주석을 심화개혁의 ‘최고 설계사’라고 평가했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을 연상시킨다. 유례없는 반부패 활동을 벌이고 있는 시 주석은 스스로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덩샤오핑의 ‘적통’임을 과시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그가 부패와 관료주의를 척결해 새로운 개혁과 성장 시대로 이끈, 덩샤오핑에 필적하는 지도자로 남고 싶어 한다고 보도했다.

머리는 덩샤오핑을 닮고 싶어 하지만 행동은 마오쩌둥에 다가가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덩샤오핑이 권위로 통치했다면 마오쩌둥은 힘으로 통치했다. 시 주석은 지난해 마오쩌둥 시대를 연상시키는 ‘정풍(整風)운동’에 착수했고 ‘모든 것은 군중을 위해, 군중을 의지해, 군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군중노선 실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마오 시대 반대파 숙청의 도구로 사용되던 자아비판을 “몸에 좋은 약”이라고도 했다. 시 주석이 인민일보 기사에 등장한 빈도가 마오쩌둥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홍콩대의 분석도 있다. 시 주석의 연설문집은 발간 6개월 만에 1000만부가 팔리며 마오쩌둥의 어록 ‘훙바오수(紅寶書)’이후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기네스북에 따르면 50년 전 발간된 훙바오수는 현재 9억부가 팔렸다.

50년 뒤 시 주석의 연설문집이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는 중국 역사에 남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집권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판단하기는 이르다. 또 아직까지는 의문부호를 다는 전문가들이 많다. 케리 브라운 시드니대 교수는 최근 BBC중문망과의 인터뷰에서 “덩샤오핑은 역사적 흐름을 뒤바꿔 놓았지만 시진핑은 여전히 덩샤오핑이 만든 틀 속에서 개혁을 지속하고 있을 뿐 창조해낸 것은 없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일부 사람들을 먼저 부유하게 만드는 목표를 실현했지만 시 주석 앞에는 모두가 잘사는 ‘공동부유(共同富裕)’라는 과제가 놓여 있다. 더 나아가 역사에 남으려면 경제개혁 외에 덩샤오핑이 하지 않은 정치와 사회 분야 개혁을 해야 한다. 공산당중앙당교 기관지 학습시보의 전 부편집인 덩위원은 “만약 시 주석이 중국에 자유민주시대를 연다면 새로운 역사적 위치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베이징=맹경환 특파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