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세상 읽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입력 2014-08-23 03:39

얼마 전 미국 텍사스주의 휴스턴이란 도시를 방문해 다운타운의 호텔에서 며칠간 머문 적이 있다. 30여년 전에 같은 곳에서 공부하기 위해 몇 년 머문 적이 있지만, 다운타운의 구석구석을 둘러볼 기회는 없었다. 그때는 절박함 심정으로 앞을 향해 질주하듯이 달려가던 시절이라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주변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나아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전적으로 세월의 흐름 탓일 것이다. 그래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와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자고 마음을 먹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초현대식 빌딩들이 밀집한 다운타운에 볼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도시이든 그곳에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성장을 위한 사람들의 치열한 노력들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내가 갖고 있는 삶에 대한 관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기쁨이나 행복이란 대단한 것에서부터 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흔히 무엇을 이루고 난 다음 다시 말하면 완벽한 상태가 되었을 때 크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 주인 되는 마음을 갖고 행동한다면 크고 작은 기쁨이나 행복을 수시로 수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여행을 해 보면 부지런히 주변을 관찰하고 무엇인가를 배우려 노력하는 것은 사람들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더운 여름 날 다운타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둘러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호기심의 강력함에 따라 다른 듯하다. 이번 여행길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제각각의 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나는 “늙어가는 것은 호기심과 감탄사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나는 이제까지 휴스턴이란 도시의 이름이 텍사스 독립전쟁(1835∼1836)의 영웅인 샘 휴스턴 장군을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텍사스의 땅에 투자를 해서 한몫을 챙기려는 뉴욕 출신의 ‘토지 투기꾼’인 알렌 형제가 등장한다. 이들 가운데 형님이 주도적이었는데 그는 안정적인 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부를 얻기 위하여 오늘날 휴스턴의 다운타운 부근에 땅 투기를 감행한다. 자금은 갓 결혼한 부인이 물려받은 유산을 제공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한 가지 있는데 새로운 땅 투기 지역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라는 점이다. 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녀는 샘 휴스턴이라는 유명한 장군의 이름이 마케팅 측면에서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녀의 추측대로 휴스턴이라고 이름을 붙인 다음에 이주민들이 급증하여 그들은 상당한 재산을 모으는 데 성공하게 된다. 미국이란 나라의 곳곳에서 프런티어 정신의 과거 흔적들과 현재 진행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간단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박물관 자료와 관련 문헌으로 확인하면서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어느 곳에서든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일이다. 다운타운의 휴스턴 공공도서관 바로 곁에 스페인 르네상스 스타일의 벽돌 건물인 구 휴스턴 공공도서관이 위치해 있다. 이 도서관은 ‘줄리아 아이디슨 빌딩’으로 불린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첫 도서관의 사서로 출발하여 도서관장직을 사망할 때까지 맡았고 미국 여성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던 공적을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휴스턴 일원의 공공도서관 시스템을 정착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망한 해가 1945년인데 도서관에 그녀의 이름을 붙인 것이 1951년의 일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공적을 기념해서 휴스턴의 가장 중요한 도서관에 그녀의 이름을 붙여준 것이 예사롭지 않다.

미국도 다양한 사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미국 구석구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상적인 것은 공익을 위해 헌신하거나 기여한 사람들은 정파를 초월해서 기념하려는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는 점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는 당신의 헌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흔적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간 부럽지 않다.

우리 사회는 흑과 백이 지나칠 정도로 뚜렷하게 구분하며, 누군가를 정죄하는 데 익숙한 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사람의 인생은 다수의 빛과 소수의 그림자로 구성될 수 있다는 인정을 하게 된다. 완벽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림자를 지나치게 부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빛이 큰 경우는 그림자를 어느 정도 가려줄 수도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성경에서는 이를 두고 긍휼이란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원래 성서적 의미는 하나님이 피조물의 불완전성을 불쌍히 여기시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이를 우리들 인간에게 적용하면 긍휼을 입은 우리들 역시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사회도 정죄로부터 기념하고 기억하고 용서하는 사회로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